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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턴 무한 반복이었다. 미팅 끝나고 마무리할 때,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외근을 오가는 택시에서 한주와 나는 서로 다른 생각을 내세우며 부딪혔다.
“그 행복이란 말 좀 그만해라. 어찌 됐건 KPI를 달성해야지. 그게 마케터의 기본자세라고”
“하지만 목표 달성은 고객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넌 인마,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래. 회사에서는 마케팅을 돈 쓰는 집단으로 보거든? 영업이나 재무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어요. 마케팅이 빈틈 보일 때만 기다린다고”
“빈틈을 보면 어떻게 하는데요?”
휘유, 난 짧은 한숨을 쉬고 나서 어린 학동을 타이르는 서당 훈장님의 표정으로 말했다.
“마케팅 예산 깎이고, 그래서 성과 못 내고, 또 그게 반복되는 악몽 같은 뫼비우스의 띠가 이어지는 거야”
“전 모르겠어요. 마케팅은 고객이 시작이라고 믿었는데, 대리님은 고객 이야기를 안 해요”
이렇게 티격태격하기 일쑤였지만, 우리 둘 사이는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하는 합이 잘 맞아가고 있었다. 한주를 받은 지 6개월이 넘어가고 있을 때, 이제 녀석 단독으로 할만한 일들을 마련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 가지 프로젝트를 추려 관련된 파일들을 하나의 폴더에 복사해 넣고 있을 때였다. 한주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 대리님, 오늘 술 사 주세요
“야. 고개만 돌리면 바로 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무슨 톡이냐. 말로 하지….”
한주의 자리 쪽으로 의자를 돌리고 말을 꺼낼 때였다. 핸드폰에 바로 다음 메시지가 떴다.
- 저 회사 그만두려고요
테이블에 놓인 치킨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소주 잔만 들이켰다. 반 병 정도 비워졌을 때 자리에 앉은 후 처음으로 한주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 때문이냐”
그렇다는 답이 나올까 무서웠다. 나름 잘 해준다고 했는데, 결국은 이 녀석도 볼드모트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린 걸까.
“아니에요”
“그럼 뭣 땜에? 너 회사에서 나름 평판 좋아. 나랑은 다르다고, 일 잘하면서 주변도 잘 살핀다고 얼마나 칭찬하는데”
“회사가 싫어서는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뭔데?”
“유학 가려고요. 지난주에 왔어요. 입학 허가서가”
한주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후, 모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 MBA에 입학 지원서를 냈다고 했다. 이름을 들으니 어떤 교수인지 기억났다. 맘에 드는 졸업생에게는 꼭 한 번씩 자기가 유학한 학교에 지원해 보라고 부추기던 영감님. 나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다는 것 때문에 별로 좋아하는 은사는 아니었다.
“영어 점수도 있고, 별로 특별히 준비할 게 없어서 그냥 내봤어요. 될 거라는 기대는 안 하고요”
“그런데 덜컥 됐더라, 야. 너무 뻔한 거짓말 아니냐?”
한주는 대답 없이 양손으로 테이블 위의 맥주잔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미안했다. 잘 해주지 못해서”
“갑자기 떠나게 되어서 제가 대리님한테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고맙긴. 너 유학 가는 데 뭐 보태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요. 대리님이 보태준 거”
한주가 마지막까지 애먹었던 것은 에세이 작성이었다고 했다. 자유 주제이어서 더 막막했다. 그러던 중 나와의 첫 술자리에서 제목이 떠올랐다고 했다.
- 마케팅 목표와 고객 행복 간의 관계
“그날 대리님하고 이야기하던 중에 뭐라고 쓸지 떠오르더라고요. 기업의 목표와 고객의 행복 사이에서 마케터는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어떻게 둘 사이의 간격을 줄일 수 있을까?”
바로 어제까지도 한주와 내가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하던, 지난 몇 달간 틈나는 대로 설전을 벌여온 주제였다. 한주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마 내 얼굴 어딘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을 테지.
비 내린 다음 날이어서인지 밤 하늘이 맑았다. 밖으로 나온 후 나란히 차도로 걸어가던 중, 한주가 가로등 아래서 잠시 멈춰 선 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탁 하나 있어요”
“뭔데. 말해라. 또 에세이 하나 써주랴?”
“저, 그동안 잘해온 거 맞으면,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세요”
“뭐, 유치원 생이냐” 한마디 툭 내뱉고는 녀석의 정수리 위로 손을 올려 몇 번 움직였다. 손을 뗀 후 멋쩍은 표정의 나를 올려다보는 한주는, 우는 듯 웃고 있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됐다. 해리포터는 퇴사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볼트모트라 불리지 않고 있었다.
내 주장을 하기 전에 5분만 상대방 이야기를 이해하려 해 볼 것
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해 볼 것
문장 형태가 아니라 질문 형태로 내 의견을 전달해 볼 것
그리고,
고객이 행복할까? 지금보다 더 고민해 볼 것
한주가 마지막 출근 날, 포스트잇에 적어 내 책상에 붙여준 말들 덕분이었겠지.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하고, 인상도 비슷한 두 아이가 똑같은 말을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그날, 매장 앞 가로등 아래에서 흰 입김을 머금던 민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리운 기분이 들었던 것도 이제 이해가 된다. 민주의 이력서 사진을 봤을 때 이유 없이 반가웠던 것도, 채용을 반대하던 강한나 매니저를 왜 설득하려 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한정판 케이크 아이디어를 낸 민주에게 “잘했어”라고 말해줬을 때
멀리 바다 건너 있을, 해리포터를 닮았던 그 녀석에게도 “고맙다”라고 전해지길 바랐던 거였다고,
이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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