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오후 시간이 금세 지났다. 만호는 디지털 랩에서의 오늘 하루가 진심으로 즐거웠다. 종일 민주와 함께 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풍부하게 갖춰진 원재료로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처음 요리를 배웠을 때의 즐거움이 오랜만에 기억났다.
“진심이야. 만호 씨 자주 와요”
전도일 셰프는 만호가 꽤 마음에 들은 듯 말끝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만호와 민주가 감사의 인사와 함께 디저트 랩을 떠날 때에는 매장 식구들과 함께 먹으라며 시제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빵과 쿠키를 한 아름 챙겨주기도 했다.
“와. 즐거웠다! 만호 씨는 어땠어요?”
만호는 빙긋 웃기만 했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은 선배를 만나서 마음껏 했다. ‘좋다’는 단어로만 꽉 채울 수 있는 하루였다.
“전도일 셰프, 멋있었죠”
“네! 처음에는 평범한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섬세하고 자상하고. 실력도 있고. 또 이렇게 선물도 많이 주고! 히히”
나도 언젠가는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만호의 마음에 또 한 번 흐린 구름 하나가 드리워졌다.
“아, 배고프다. 학식 때도 그랬지만 구내식당 밥은 왜 이렇게 빨리 꺼지죠?”
민주의 말을 들으니 만호도 허기가 느껴졌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중에 주변에 음식점이 있는지,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때 만호 씨가 구워준 고기 진짜 맛있었는데! 회식 또 안 하나?”
민주가 입맛을 다시며 회식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만호가 옆에서 걷고 있는 민주의 팔뚝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고기, 또 구워 줄까요?”
지하철역 6개를 지나면 만호의 부모님이 하는 고깃집이 있다. 집까지 돌아서 가는 길이 아니라면, 들러서 저녁 먹고 가라고 만호는 더듬으며 말했다.
“다른 뜻은 없어요. 민주 씨가 고기 이야기를 하길래… ”
민주는 잠깐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거든요. 맥주라도 한잔하면 어떨까 했는데, 대신 셰프가 쏘는 거죠!”
잠깐만 기다려요,라고 말한 후 만호는 서둘러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느낌의 음식점이었다. 만호가 쟁반에 밑반찬을 가져와 놓고 다시 주방으로 간 사이, 또 한 명의 직원이 숯불을 들고 와서 테이블 중앙에 움푹 파인 불통에 넣었다.
“안녕하세요” 민주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그 직원은 민주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다.
“만호랑 같이 일하시는 분이라고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 네. 남민주라고 합니다”
“말로만 듣다가 이렇게 보니까 되게 반갑네요. 후후”
큰 키에 톰보이 컷의 짧은 머리를 한 그녀는 언뜻 보면 예쁘장한 남자로 보일 만큼 행동과 말투가 털털했다.
구이용 고기를 들고 테이블에 온 만호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손으로 여자 직원을 옆으로 밀었다.
“야, 뭐야. 가서 일이나 해”
“뭐 어때? 네 친구면 나한테도 친구인데. 안녕하세요. 전 김예지라고 해요”
민주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만호는 예지의 등을 양손으로 밀며 “됐어. 이제 저리 가”라고 했다.
치익. 만호가 고기를 굽고 있는 모습을 민주가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 친구예요. 초중고 계속 같이 다닌”
만호가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김예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뭐 걔나 나나, 공부엔 관심 없었으니까. 학교 끝나면 우리 가게 일 같이 돕고 그랬거든요.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여기서 일하고 있더라고요”
맛깔스럽게 구워진 고개를 입에 넣어 우물거리며 만호의 말을 듣던 민주가 놀리는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서로 썸 타고 그런 사이는 아니고요?”
만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썸이요? 쟤하고 옛날에는 같이 목욕도 하던 사이인데요. 내 이상형은 저런 선머슴보다는…”
다음 말을 생각하던 만호는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고기를 구울 때면 불판에만 집중하던 만호이지만 오늘은 알맞게 구워내는 타이밍을 자주 놓치고 있었다. 맞은편의 민주가 맛있게 먹고 있는지, 뭐 더 필요한 반찬은 없는지, 물 잔을 채워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무슨 재미있는 대화 거리는 없을지,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계산대 위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예지가 전화를 받아 통화한 후 만호를 불렀다. 잠시 후 테이블로 돌아온 만호가 민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민주 씨 혼자 있어야겠다. 갑자기 동사무소에서 단체 손님 예약 전화가 와서요. 준비하는 거 도와야겠어요”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만호를 민주는 바라보고 있었다. 탕탕 소리를 내면서 도마 위의 재료를 자르는 만호의 모습. 커다란 볶음 냄비로 뭔가를 굽고 있는 모습. 테이블을 세팅하면서 주방 사이를 바삐 오가는 모습. 약하게 줄여놓은 불 위에 놓인 고기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지만 민주는 한참을 민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19) (0) | 2022.09.12 |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18) (0) | 2022.09.09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16) (0) | 2022.09.07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15) (0) | 2022.09.06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14) (0) | 2022.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