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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이 치워진 흰색의 케이크를 만호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한번 먹어 보세요”
자신이 만든 케이크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손을 댄 전도일의 행동이 만호는 불쾌했다. 이제는 그저 평범한 케이크 아닌가. 가만히 서 있는 채인 만호를 대신해서 민주가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들어내 입에 가져갔다.
“어?”
동그래진 눈으로 도일과 만호를 번갈아 보는 민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훨씬, 맛있는데요?”
만호는 케이크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매실이 놓였던 자리에 아주 약간의 과즙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입 먹어봤다. 매실 조각에서 나오던 강한 신맛 대신, 은은하면서도 확실한 새콤함과 달콤함이 입안에 감돌고 있었다.
이제야 알아챘냐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도일이 만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알고 보면 간단한 거예요. 과일 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많다는 거지. 꼭 그 과일을 올리지 않아도”
연달아 케이크를 떠서 입에 가져가고 있는 민주를 보며 도일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게 늘 좋은 건 아니지. 소박해 보여도 더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는 게 세상에는 많거든”
기왕 왔으니, 오늘 하루 여기에 있는 재료를 마음껏 쓰면서 레시피를 개발해 보라고 도일은 말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이는 만호의 모습에 도일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뭐, 유영빈 과장한테 신세 진 게 많아서. 이렇게 갚는 거예요. 언제 소주 한잔하러 오라고 전해줘요”
만주와 민호가 주방에 나란히 서서 구비되어 있는 온갖 재료들을 조합해 보던 중이었다. 디저트 랩의 직원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도일이 빠른 걸음으로 만호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거 어쩌지? 점심 사주려고 했는데, 대표님이 갑자기 신메뉴 테스트 겸 시식을 한다고 하셔서. 우리는 모두 거기에 가게 됐네요”
지하 1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먹으면 된다고 하며, 도일이 자기 사원증을 만호에게 건넸다.
구내식당에 도착한 만호와 민주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식판에 음식을 받아들고 자리를 잡았다.
“식당 정말 넓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밥 먹는 거 처음 봐요”
“그러게요. 이 건물에 일하는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은데요”
삼삼오오 모여 웃고 이야기하는 또래 나이의 직원들의 모습에 만호는 아침의 씁쓸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민주 씨는 언제까지 아르바이트할 거예요?”
“취업될 때까지는 해야죠. 지금 카페 일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알바는 알바니까요”
만호의 가슴 한 쪽 언저리에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아픔이 아로새겨졌다.
“지금도 계속 알아보고 있는 거예요?”
“그럼요. 이력서는 꾸준히 내고 있어요. 답이 없어서 문제지. 히히”
허공에 젓가락을 든 채로 가만히 있는 만호에게 이번에는 민주가 물었다.
“만호 씨는요? 계획이 뭐예요?
민주에게 뭐라도 그럴싸한 계획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공부가 좋아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모님도 한창 고깃집 장사를 키울 때여서 만호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농구하고 놀다 보니 어느새 졸업이었다. 대학교는 가지 않았고 바로 군에 입대했다.
2년 동안 취사병으로 복무하면서 요리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가게를 도왔기 때문일까. 음식 만드는 것에 나름의 소질도 있음을 알게 됐다.
만호는 제대 후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 커리큘럼을 마치기 전부터 그의 실력을 알아챈 몇 군데에서 먼저 아르바이트 채용 연락이 왔다. 가장 이름이 알려진 곳을 택했는데, 유명 호텔 본점의 베이커리 주방이었다.
그곳에서 일한 지 3년째가 되었을 때, 정규직 전환을 제안받던 날 만호는 그만뒀다. 다시 군대에 돌아간 것 같은 3년이었다.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경직된 문화.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 보려다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계속 머무르다가는 요리 자체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 만호는 두려웠다.
부모님은 내심 아들에게 본격적으로 고깃집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몇 달 부모님 가게 주방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기 시작한 이유였다.
“글쎄요.. 지금은 매일매일이 즐거우니까, 딱히 앞날을 생각한 건 없어요”
민주가 내일이라도 카페 토라세 방배점을 떠나게 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민주를 향한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더 공부를 했었더라면, 매장의 유영빈 점장이나 서한준처럼 내가 본사에 소속된 정직원이라면 좋을 텐데. 그럼 눈앞의 이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과감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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