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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피자를 들고 호수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유영빈 점장이 사가지고 온 치킨 두 마리는 벌써 사라져 버렸기에 일행들은 그의 손에 들린 피자 박스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 카페 토라세 방배점 직원들이 앉은 한편에는 빈 맥주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마침 근처 마트에서 와인을 사가지고 돌아오던 서한준이 막 자리에 앉은 만호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딱 맞춰 왔네요. 술도 떨어지고 안주도 없어서 그랬는데”
“점장님이 오라고 하셔서 왔는데, 제가 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에요. 오늘 만호 씨가 만든 샌드위치가 얼마나 인기 많았는데”
민망한 표정의 만호를 보고 강한나 매니저가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을 건네며 괜찮다는 듯 싱긋 웃었다.
가로등 불빛을 머금어 분홍색으로 물든 벚꽃잎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대며 흔들렸다. 주변에는 저마다 먹거리와 술을 가져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근처에서 휴대용 스피커로 틀어 놓은 재즈 선율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가끔씩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손뼉 치는 소리로 이어지기도 했다.
“좋네요. 다들 청춘이구나”
영빈이 방금 웃음소리가 나온 일행을 바라본 후 밤하늘 위로 고개를 들고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한유리가 아무 말 없이 서한준이 사 온 와인을 플라스틱 잔에 따라 그에게 건넸다. 둘은 별말 없이 서로 눈빛을 교차하는 것만으로 건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가슴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셋이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서 처음 가졌던, 영빈과 유리가 직장 동료 이상의 관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난 밸런타인데이 저녁에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유리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숨어버린 그날부터 민주는 영빈을 예전처럼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자신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만호가 피자 조각을 덜어 민주에게 건넬 때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영빈을 향해 있었다. 요즘 점장을 볼 때면 흔들리곤 하던 그 눈빛이었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민주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가득해 보였다.
“식기 전에 먹어 봐요. 이태원에서 인기 많은 집이래요. 얼마 전에 우리 매장 근처에 분점을 열었더라고요”
자기 앞에 놓인 피자도 알아차리지 못한 민주의 모습에 만호는 그녀의 팔뚝을 살짝 만지며 말했다. '가끔은 내 쪽도 좀 봐주면 안 돼요’라고 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제야 피자를 본 민주는 다시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벚꽃 아래 맛있는 안주까지! 행복해라”
다시 생기를 찾은 듯 애쓰는 민주의 얼굴에 만호는 아무도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부터 만호를 유심히 보고 있던 한유리가 와인 한 모금을 마신 뒤 그에게 물었다.
“만호 씨, 우리 매장에서 좋아하는 사람 있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빨개진 만호의 얼굴에 민주가 놀란 표정으로 “엣? 셰프, 정말이에요? 누구?”라고 물었다. 유리는 민주의 모습에 ‘아, 만호 씨 힘들겠구나. 얘는 전혀 모르고 있네’라고 생각했다. 방배점에 온 후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빤히 보였다. 조리실에 들릴 때마다 봤던 만호의 모습에서 그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과, 하지만 그 대상인 민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걸.
당황한 표정인 채인 만호를 보고 있는 서한준은 속이 답답했다. 보통 눈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민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만호를 잘 따르긴 했지만 민주는 전혀 그런 감정이 아니었고, 만호도 혼자 끙끙댈 뿐 자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들이나 할 법한 이 수줍은 관계가 한준은 보기 좋았다. 지금은 우선 만호의 난처한 상황을 돕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제가 있는데요”
서한준은 오른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탄성도, 정적도 없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뭐 새삼스럽냐는 듯한 헛웃음이 이어질 뿐이었다. 강한나에 대한 서한준의 구애는 이미 방배점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만해라. 내일부터 다시 매장으로 가기 싫으면” 강한나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점심도 거른 채 일한 후 빈속에 마신 술 탓인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한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한유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한유리 과장님은 어때요?”
그의 질문에 멈칫한 것은 유영빈이었다.
“본사에 있는 동기들 말로는, 워낙 미인이신데 남자 친구는 없어서 다들 신기해한다던데요”
“흐응, 그래요?” 와인을 계속 홀짝였던 탓인지, 한유리 또한 양쪽 볼이 발그레 진 채였다.
“어때 보여요?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또 재밌는 얘기가 있던데요. 점장님이 본사 마케팅팀에 있을 때 두 분이 유명했다고, 서로 못 잡아먹는 관계로요”
서한준이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한 손가락을 세우며 궁리하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래서, 혹시 싸우다가 정든다고. 점장님과 뭐가 있진 않을까? 생각이 들었단 말이죠”
영빈이 급하게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맞아. 내가 한유리 과장님하고 좀 안 좋았던 건 사실이에요. 근데 다 옛날 일이고. 지금은 안 그래요. 오늘도 봐,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해줬잖아. 그 얘긴 이제 그만합시다”
유리는 아니라는 듯 영빈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근데? 그래서 지금은 어때 보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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