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다시 후회할 줄 알았다면 아픈 시련 속에 방황하지 않았을텐데] 왜 사제가 되고 싶었을까. 영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사제 시키고 싶어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가족이라곤 둘 밖에 없어서 였는지도 몰랐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던 영호는 의대나 법대를 졸업하고 빨리 성공해서 엄마를 돕고 싶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사교육은 필요했고 학원비를 대기 위해 어머니는 밤낮없이 일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성당에서 복사를 섰던 건 그가 제대 위에 올라있는 모습에 기뻐하는 어머니를 위해서였지, 4년간 함께 복사를 섰던 친구처럼 신학교 입학을 꿈꾼 적은 없었다. 고 3 여름방학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심정지였다. 악성..

[그대 왜 나를 그냥 떠나가게 했나요] 옥수 터널을 지나 버스는 장충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호는 여전히 수진과 닮은 여자 승객을 신경 쓰며 운전했다.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그녀가 내리지는 않는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훔쳐봤다. 방금 옥수동 인근을 지날 때 여자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영호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당이 있는 동네, 수진을 만난 장소였다. 우리 둘의 일을 기억하고 있던 건가. 정말 수진이 맞는 걸까. 손영호 바오로 신부가 안수진이란 여자를 마음에 들여놓게 된 건 그로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못내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감정을 확인한 순간, 그의 삶과 수진의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

[애타게 기다리지 말아요. 사랑은 끝났으니까] 루카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음악회를 보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왔다. 190 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정돈되지 않은 채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와 파란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유럽 남자였다. 남성적인 인상과는 달리 운동에는 취미가 없고 수줍음이 많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레코드를 모으는 게 가장 즐거운 취미인 그는 신년 음악회를 직접 보는 게 평생의 꿈이었고, 마침 소망을 이룬 순간 수진이 옆에 있었다. 절반 정도는 모르는 곡이었지만 분위기를 충분히 즐겼던 수진과 달리 루카스는 지금껏 수천 번 넘게 들어 멜로디를 외우고 있는 모든 레파토리를 머릿속으로 따라 흥얼거릴 수 있었다. 라데츠키 행진곡의 마지막 앙코르 연주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