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슬픔 대신 분노를 택한 영호는 그에 걸맞은 직업을 가졌다. 경찰이었다. 마침 1년 전세 기간이 끝난 부산의 집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노량진 고시촌으로 들어간 그는 첫 응시에서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오직 공부와 체력 단련에만 집중했다. 사람과 어울릴 이유와 여유 따윈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했을 뿐이다. 모든 게 부조리했고 세상은 불합리했다. 대상을 찾을 수 없이 불타오르고 있는 화를 법에 저촉되지 않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범죄를 단죄하는 것이었다. 영호는 높은 점수로 합격했는데 상위권 지원자들은 몸이 편한 내사 부서를 지원했지만 그는 강력계를 택했다. 체력 시험 준비 수준을 넘어 몸..
[아무런 느낌 가질 수 없어요] 영호는 작은 나무 상자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택시 뒷좌석에 앉아 눈 덮인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하얀 보자기로 감싼 정사각형 상자 안에는 한 번 안아 보지도 못하고 눈을 마주해 보지도 못한 아기가 들어 있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구부러진 길을 지나야 해서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진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화장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 작은 것이 얼마나 뜨거울까. 따스한 엄마 아빠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하고 뼈마저 녹이고 삭혀 버릴 불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기쁨이가 너무 가여워서 영호는 숨죽여 흐느꼈다. 상자에 담긴 채 아기가 화장로 속으로 들어간 후에 영호는 유골함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갔다.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좋은 걸로 골라야..
[사랑은 이제 내게 남아있지 않아요]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루카스 이름이 화면에 떴다. 수진에게 연락할 때면 그는 언제나 메시지 대신 전화나 영상 통화를 했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너무 옛날 방식 아니냐고 농담처럼 놀릴 때면 “당신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당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게 좋기 때문이야”라고 수줍은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일할 때는 몇 개의 메신저를 번갈아 사용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수진이었다. 지금도 점심 식사는 어땠는지,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는지,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등 별것 아닌 내용이었지만 통화하는 내내 그의 들뜬 기분이 전해왔다. 지금까지 항상 변함없는 사람. 늘 이렇게 날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 그를 생각할 때면 수진은 환한 햇살이 눈이 부셔 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