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 하는 현자의 팔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문 앞까지만 부축하려 했던 진욱은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실례지만, 같이 모시고 들어갈게요”라고 말했다. 현자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1101호는 진욱의 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두 배는 넓어 보일 정도였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거실은 휑했다. 티브이도, 소파도 보이지 않았고 현관 맞은편 벽 앞에 일인용 안락의자와 작은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책이 서너 권 있는 것으로 보아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소파가 있으면 그 위에 그녀를 누일 생각이었던 진욱은 난감한 표정으로 부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싱크대 맞은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커다란 원형 식탁이..

아끼꼬가 독신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를 만나 사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만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명절이 되어 이모네 가족들이 한데 모이면 성인이 되어 분가해 사는 사촌 형제들은 이미 혼기가 훌쩍 지난 아끼꼬를 걱정해 주었고 중매를 주선하기도 했다. 여전히 단란한 그들 식구의 모습이 좋았고 자신이 거기 속해 있음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아끼꼬는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런 가족을 만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엄마가 된다는 건 그녀에게 결코 손에 쥘 수는 없는, 저만치에서 흐릿하게 부유하고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 경제가 호황을 맞으며 사무 보조로 일하고 있는 무역 회사도 나날이 성장해 나갔다. 어느 날 매출 전표를 처리하던 중에 아끼..

진욱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늘 흐릿했다. 몇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얼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널찍한 어깨 위에 올라타고 봤던 동물원 기린의 모습, 여름 바닷가의 짠 바람 냄새였으나 정작 그에 대한 것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진욱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말로는 교사를 했으면 딱 맞았을 정도로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평범한 회사원이자 세 식구의 가장이었던 그는 어느 날 지방 출장 길에 기차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이 정면으로 충돌해왔다. 그와 동승한 후배 사원을 포함한 세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후 어머니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진욱을 키웠다. 여상을 졸업한 후 바로 경리로 취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