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남았으나 나갈 차비를 마친 후 영호는 집을 나섰다.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민망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 장소인 공원에 도착해 중앙 광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일 오후라 주변은 한산했다. 영호는 핸드폰을 열어 로망스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봤다. 말투로 봐서도,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깎아달라는 말없이 바로 사겠다는 걸로 생각할 때 나이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백발에 인상 좋은 노신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은퇴한 교수님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별 어려움 없이, 더 이상 이룰 것 없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온 사람.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부러움과 함께 작은 질투가 발바닥에서부터 꼬물대는 것이 느껴졌다. 로망스의 프로필 사진은 컵..
“한국의 교육 환경에 애가 적응을 못할 거 같아.” 최근 계속되는 야근으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영호를 아내가 부엌으로 불렀다. 그러고는 더 늦기 전에 뉴질랜드로 보내야겠다면서 유학원 팸플릿을 식탁 위에 늘어놓으며 영호에게 말했다. 상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게다가 여자애 혼자 보낸다는 건.”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야지.” 피곤에 절어 흐리멍덩하던 영호의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이 왔다. 말로만 듣던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건가. “돈은 어떻게 마련하려고. 이 집은 어떻게 하고.” “일단 전세로 돌려서 급한 대로 써야지.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작은 원룸 얻어서 거기서 지내 줘. 어쩌겠어. 애 잘 키우는 게 우선이잖아. 같이 딱 4년 정도 고생한다고 생각하자.” 좋은..
구릿한 냄새에 영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에서 풍기는 악취가 잠결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틀 동안 안 씻고 있었으니 비단 머리뿐 아니라 온몸에 찐득한 때가 끼어있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조그만 원룸이 환했다. 창문에 반투명 커튼을 쳐 놓았지만 강한 햇빛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싱글 사이즈 침대 다섯 개 정도 크기의 공간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과 빈 컵라면 용기, 맥주 캔과 소주 병 때문에 더 비좁아 보였다. 쨍한 햇살 사이로 부유하고 있는 먼지가 또렷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창문을 열고 전자 담배 전원을 켰다. 점심시간인 듯 근처 중학교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상쾌했다. 일어나자마자 피는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