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어, 여기야” 저녁 시간의 식당은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경근을 먼저 발견하고 안정호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경근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다섯 시에 광고주 연락 서 일을 시키는 바람에” “하하. 광고쟁이 숙명이지 뭐. 어디 애들이? 컴택?” 정호가 경근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경근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잔을 받았다. “아니요. 팀장님 나가시고 신규 영업한 데가 하나 있어요. 이제 막 투자 기 시작한 스타트업인데, 그쪽이 맨날 밤새 일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네요. 그나저나 어떠세요? 광고주 가니까 삶의 질이 높아지셨나요?” 경근과 잔을 부딪히며 말도 마라는 듯 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는 와 보니까 영업 판이야. 광..
“짐이 고작 그게 다예요?” “난 언제나 백팩 하나로 챙길만큼 밖에 짐이 없어. 봐봐, 노트북 거치대도 없이 책 쌓아서 높여 놓았잖아.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늘 단촐하다 못해 휑하던 신팀장의 책상이 이제 정말 텅 비었다. 출입문 밖으로 배웅을 나가던 호진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제 술자리 파할 때 꼭 포옹을 했었기에 그때만큼의 감흥은 아니지만, 그래도 찡하긴 마찬가지였다. 연락 드릴게요, 자주 뵈요. 호진보다 1년 먼저 경력직으로 입사했던 신팀장이 떠났다. 호진의 옆 팀인 고객 정보팀장이었던 그는 지난 5년 간 호진의 동료이자 스승이었고, 마음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형이었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호진은 그를 경계했다. 첫 회의에서 신 팀장의 발표 화면을 보..
“그래서 전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당연히 가야지, 이 등신아" 대학 동문이라 늘 편하게 대하는 L상무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고 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가는 쪽으로 기울던 호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이직이었다. 호진이 속해있는 온라인 사업부가 통째로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 이동하는 것으로 윗선에서 결정됐다. 필요한 행정 절차를 거쳐 다음 달 1일부터는 호진을 포함한 사업부의 모든 인원이 회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각 계열사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온라인 사업을 전문 회사로 한데모아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었다. 다만 일대일 면담을 통해 옮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사람은 남을 수 있다는 인사팀의 안내가 있었다. 고민할 시간은 약 2주가 주어..
“오늘은 연차 쓰시고 오신 건가요?” 4명의 면접자 모두가 그렇다고 답했다. 설사 아니더라도, 재택 근무 중에 잠깐 나왔거나 혹은 외근 나간다 하고 면접을 보러 왔더라도 ‘하루 연차를 썼다’라고 하는 것이 암묵적인 정답임을 호진도 잘 알고 있다. 자신도 예전에 똑같이 말했으니까. 지금의 회사에서 ‘조그만 거짓말’을 하고 면접을 보러 나왔다는 것은, 여기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줘야하는 면접에서는 금기되는 말이다. 사람을 좋게 평가할 면을 찾는 것보다, 안좋은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다. 첫 면접자 A는 마치 신입사원 면접에 온 것처럼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앳된 얼굴에 아직 경력도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호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