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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여기야”
저녁 시간의 식당은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경근을 먼저 발견하고 안정호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경근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다섯 시에 광고주 연락 서 일을 시키는 바람에”
“하하. 광고쟁이 숙명이지 뭐. 어디 애들이? 컴택?”
정호가 경근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경근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잔을 받았다.
“아니요. 팀장님 나가시고 신규 영업한 데가 하나 있어요. 이제 막 투자 기 시작한 스타트업인데, 그쪽이 맨날 밤새 일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네요. 그나저나 어떠세요? 광고주 가니까 삶의 질이 높아지셨나요?”
경근과 잔을 부딪히며 말도 마라는 듯 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는 와 보니까 영업 판이야. 광고는 그냥 영업하는데 도움되니까 하는 거지. 왜 그런 거 있잖아? 요즘 탤런트 누가 나오는 광고도 합니다, 하고 약국에 포스터 하나 넣는 수준. 예산도 리베이트 등 영업에 들어가는 돈에 십분의 일이나 될까?”
스팅애드에서 경근의 팀장이었던 안정호는 제약 회사 마케팅팀 팀장으로 옮겼고, 경근은 거의 일 년 만에 정호를 다시 만났다.
“그래도 대행사 쓰시니까 입에 달고 사시던 ‘을’ 역할 안 해서 좋지 않아요?”
“광고주 맨날 노는 줄 알았지? 아니야. 바빠. 그런데 맨날 숫자야. 파워포인트 켤 일이 없어. 거의 메일 엑셀이야. 매출 분석, 수요 분석, 그리고 결국은 부진 분석”
정호는 자기 말이 우스웠는지 크크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래도 얼굴은 좋아지셨어요”라는 경근의 말에 “하긴 그때보다는 낫지”라며 정호가 스마트폰에 온 메신저 문자를 봤다.
“실은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같이 보려고 불렀어. 곧 도착한대. 괜찮지?”
정호가 팀장이었을 때도 스스럼없이 지냈던 경근이었지만 아무래도 단둘의 자리는 부담스러웠던 참이었다. 잘 됐다 생각하던 차에 정호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경근에게 했듯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인사해. 내 대학 동기야. 여기는 내가 스팅애드에서 데리고 있던 오경근 과장”
“심문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우리 몇 번 마주친 적 있는데”
“네?” 경근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붉은색 뿔테안경에 파마를 한 듯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의 중년 남자는 쉽사리 잊을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경근이 주저하자 문수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아 그때는 이렇게 튀는 외모가 아니었지 참. 전 제일기획에 있어요. 우리 경쟁 PT 자리에서 몇 번 스쳐 지난 적 있어요”
“하긴, 얘가 무슨 바람인지 중년에 패셔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다. 하하”
정호가 웃으며 문수의 어깨를 툭 치고 건배하자며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원샷으로 소주를 비운 뒤 정호가 경근을 보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 회사 옮길 생각 없냐?”

문수는 제일기획에서 신입으로 시작해 삼성전자만 맡아 왔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외부 광고주 전담 팀장으로 이동되었고, 보수적인 문화의 전자 출입을 안 하게 되면서 외모에 변화를 줬다고 했다.
“아무래도 뭔가 크리에이티브하게 보여야 하더라고. 전자 때야 거기 문화 맞춰서 우리도 격식 있게 하고 갔지만”
“하긴 넌 맨날 양복 입고 다녔잖아. 촌스러워서 참. 흐흐”
“그런데 이제 광고주 관리도 해야 하고, 신규 영입도 해야 하니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더라고. 여하튼!”
가볍게 술 한잔하자고 부른 자리가 아님을 알게 된 경근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수가 “자, 한 잔 받아요”라며 경근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한 번 생각해 봐요. 우리 팀에 과장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정호한테 추천해 줄 사람 없냐고 했더니 바로 경근 씨 이야기를 하더라고”
“스팅 애드도 좋은 회사야. 규모는 작지만 똘똘하게 잘하는. 그런데 너도 이제 큰 물에서 놀아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전자 때문에 글로벌 캠페인도 많이 해서 해외 일도 할 수도 있어요. 지사도 많으니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고. 사실은, 정호 너한테도 처음 말하는 건데… 내가 한 2년 있으면 해외 지사로 나갈 것 같거든”
“오! 대박인데? 미국?”
“어딘지는 모르지. 재수 없으면 아프리카 갈 수도? 흐흐. 여하튼 경근 씨가 들어오면 내 바로 밑이니까 다음에 팀장 케이스가 되는 거예요”
솔깃한 제안이라 생각했는지 문수는 어때요?라는 표정으로 경근과 눈을 마주했다. 잠시 침묵 뒤 정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근아. 내가 솔직히 얘기할 게. 너 거기 있기 아까워”

사람들은 왜 내게 아깝다는 말을 자주 할까. 자리를 파한 후 집에 가면서 경근은 생각했다. 가까워진 사람들은, 경근에 대해 알게 된 후 속내를 서로 이야기할 사이가 됐다고 생각하면, 꼭 이 말을 꺼내곤 했다.
“그냥 참고 계속하지 그랬어. 너무 아깝다”
경근은 의대생이었다. 예과 2학년에 자퇴한 것은 피를 보는 게 체질상 버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한 후 다시 수능을 봤고 심리학 전공을 선택했다. 이번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신체이든 마음이든 사람의 아픈 구석을 살펴본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었다. 누군가의 어긋난 부분을 발견하고 제대로 돌려준다는 것에서 의대를 고른 것과 다르지 않은 맥락이었다. 의대 동기였던 여자 친구와는 지금껏 15년 가까이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개업 준비해야 하지 않아?”
“돈이 어딨냐. 조금 더 페이 닥터 하다가 스폰서라도 구해지면 그때 생각해야지”
여자 친구와 함께 의대 동기 모임에도 간간이 참석해 왔는데, 레지던트를 끝낸 동기들의 대화는 학생 시절과는 달랐다.
“경근이는 벌써 과장됐다면서? 빠르다. 돈도 꽤 모았겠는데?”
“월급쟁이 지갑은 내게 아니야. 들어오면 바로 어딘가로 나가더라. 하하”
“그런데 현주야. 너네 결혼은 안 하니? 벌써 몇 년째야 연애 한지가”
종합 병원에서 내과 전공인 현주는 글쎄? 어떻게 될까?라고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깝다. 너희가 과 커플 1호였잖아. 지금도 보기 좋지만 그땐 정말 선남선녀였는데. 경근이도 같이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걸”
모임에 둘이 같이 갈 때면 매번 듣는 이 말에 경근과 현주는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는 경근의 말에 너무 오래 생각해 봐야 결국 똑같다며 문수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말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문자로 예스, 노 이번 주까지만 답 줘요”
아니면 말고,라는 쿨한 태도였다. ‘너 말고도 올 사람 줄 서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근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이 선택에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안을 준 곳은 명실상부한 일등 광고 회사다. 연간 취급고는 글로벌까지 더한다면 스팅애드 보다 10배는 넘을 것이다. 문수는 국내 직원만 800명 정도 된다고 했다. 전 직원이 50명 정도인 지금 회사보다 급여와 복지도 좋을 것이다. 스팅애드가 ‘작지만 똘똘한 광고 회사’의 평판을 가졌다고는 하나 제일기획은 ‘오버그라운드의 한복판’으로 진출하는 셈이 된다.

옮길 때 잃을 것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안정호 팀장 때처럼 지금의 구호진 팀장도 경근에게 무한 신뢰를 주고 있었다. 기획 3팀의 에이스라는 자신의 별명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좋은 평판이 사라진다고 해도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경근이었다. 의대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상의할 때, 현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 사람 중에 가장 걱정되지 않는 사람이 너야. 네 선택을 믿어”

이번 주 내내 호진은 을지로에 만드는 컴택의 안테나숍 프로젝트로 정신이 없었다. 매장 인테리어 및 구성은 BTL 본부에서 맡아서 했지만 내부에서 노출할 영상 및 브로슈어 제작은 호진 팀의 몫이었다. 영상은 예정보다 빨리 완성됐다. 브로슈어 시안이 오픈 3일 전에야 끝나서 인쇄 시간이 빠듯했다. 용지 선택을 오늘 중에 마무리 지어야 했는데 종이 품질은 돈에 따라 달랐기에 주어진 예산에서 어떤 걸로 고를지 고민이었다.
“내가 차를 놓고 와서, 혹시 오 과장 시간 괜찮으면 점심시간에 나랑 후딱 다녀올 수 있을까? 운전기사 값으로 내가 밥 살게. 샘플 가져와야 해서 차에 실어야 할 것 같거든”
“좋습니다. 대신 맛있는 거 사 주셔야 돼요”
“그럼! 내가 충무로 맛집은 꿰고 있거든. 한때 영화인이었잖아. 하하”

“여기가 상호는 왕곱창인데 봐봐. 다들 김치찌개지? 나도 곱창은 한 번도 안 먹어봤어. 왜냐면 주로 낮술 하러 왔거든”
자리에 앉으며 호진이 말했다. 경근이 주위를 둘러보니 드럼통을 세운 모양의 동그란 테이블 곳곳에 놓인 소주 병이 보였다.
“영화쟁이들, 특히 충무로 사람들은 낮에 여기서 반주 한잔 걸치고 오후에 멍하니 있다가 밤에 일하고 그래. 차 안 가지고 왔으면 너랑 한 잔 하는 건데, 아 땡기네” 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호진이 아는 인쇄소 사장이 용지 단가를 많이 낮춰줬다. 예전에 호진이 영화 포스터 인쇄를 많이 몰아줬고, 그때 보답이라며 사장은 샘플도 자기네가 회사로 배달해 준다고 했다. 끓고 있는 김치찌개를 바라보는 호진은 어떤 과거 일을 생각하는 눈꼬리가 살짝 접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경근이 넌지시 물었다.
“저 팀장님, 스팅애드 떠나셨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호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경근을 가만히 지켜봤다. 머릿속의 생각이 읽히는 건 아닌지 경근은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뭘 어때. 당연히, 로시난테를 타고 여행을 떠난 돈키호테처럼 두근댔지”
호진이 안되겠는지 사장님, 소주 한 병이요!라고 주문했다. “팀장 권한으로 나만 마신다”며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호진이 말을 이었다.

“스팅애드가 싫고, 광고가 하기 싫어서 그만둔 게 아니었거든. 더 사랑하는 게 있어서였지”
“그게 영화였고요?”
“응, 지원한 투자배급사 합격 발표 들었을 때가 아마 지금까지 중에 가장 흥분됐던 날이었던 것 같아. 돌이켜보면”
두 번째 잔을 채우며 호진이 물었다.
“그런데 왜? 오퍼 받았어?”
어제 LG트윈스 야구 이겼어? 정도의 말투였다. 경근의 얼굴에 딱 걸렸다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알고 계셨어요?”라는 말에 호진은 “뭘 새삼스럽게. 당연한 건데 뭐. 네 연차가 제일 잘 팔릴 때잖아. 여기저기서 탐낼 만하지”라고 말하며 경근에게 미소 지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마흔 되기 전에는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네 나이면 로맨티스트로 살아도 좋을 때야. 머리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팀장님이 삽십 대에 그렇게 하셨나요?”
“그럼. 그래서 난 내가 밟아왔던 길. 여기 충무로에서 밤새우고 그랬던 날이 후회되지 않아. 남은 건 빚 밖에 없지만. 왜 그런 말 있잖아? 자네 죽기 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나?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나? 흐흐”

빈속에 마신 소주 두 잔에 술기운이 도는 듯 호진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둥근 테이블 왼편에 앉아있는 경근의 어깨를 툭 쳤다.
“때론 비틀거리더라도, 맨 오브 라만차, 돈키호테 같은 로맨티스트로 살아라! 리얼리스트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되어야 할 때가 오는 거거든”
“그래서, 가는 게 좋겠어요?”
“야, 어딘지도 얘기 안 해주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앗. 하하하. 그렇네요. 어딘지 안 궁금하세요?”
“저언~혀! 에휴, 경근아. 그냥 한 잔 받아라”
호진이 경근에게 소주 병을 내밀었다. “대신 회사까지 대리비 내주세요”라는 경근에게 “오케이, 그럼 각 일병씩이다!”라고 말하며 호진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대신 상무님한테 말하면 죽어”

호진과 손병환 차장은 안테나숍 오픈으로 종일 을지로 현장에 나가 있었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다희와 유진은 윗 사람이 없는 방학을 즐기려는 듯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경근은 책상에서 메모지에 ‘로맨티스트? 리얼리스트?’라는 두 단어를 적어놓고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이미 굳힌 상태였지만 이 두 단어가 계속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좋은 기회 주셨는데 아직은 여기서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문수의 번호로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는데 주저함은 없었다. 하지만 선택할 것이, 마음의 흐름에 맡겨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제 현주와 결혼해야겠다’
경근은 갑자기 여자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약속이나 한 듯 결혼 이야기를 심각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둘 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게 로맨티스트라는 건가’ 바로 오늘 저녁에 청혼해야겠다고 다짐한 경근은 여자친구 전화의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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