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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당연히 가야지, 이 등신아"

대학 동문이라 늘 편하게 대하는 L상무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고 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가는 쪽으로 기울던 호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이직이었다. 호진이 속해있는 온라인 사업부가 통째로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 이동하는 것으로 윗선에서 결정됐다. 필요한 행정 절차를 거쳐 다음 달 1일부터는 호진을 포함한 사업부의 모든 인원이 회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각 계열사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온라인 사업을 전문 회사로 한데모아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었다. 다만 일대일 면담을 통해 옮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사람은 남을 수 있다는 인사팀의 안내가 있었다. 고민할 시간은 약 2주가 주어졌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회사에서 호진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좋은 기회라고 했고, 내가 너라면 가지 않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간단히 결정하기 어려웠다. 경력직으로 이 회사에 온지 6년 째.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또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함이 몰려왔다. 남으라는 이들은 ‘여기서는 그래도 널 인정해주는 분위기고, 어찌됐건 이런 저런 기회가 주어질텐데 적지 않은 나이로, IT 전문회사에서 생존할 수 있겠느냐'는 애정어린, 그러나 조금은 보수적인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팀장님은 전문성이 있잖아요. 거기 가서 접수하면 되죠"

어린 친구들일수록, 호진의 마케팅 전문성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런 좋은 기회가 없다고 했다. 오프라인 유통이 저물어가는 지금, 그렇잖아도 능력있는 젊은 친구들이 줄지어 빠져 나가는 지금 분위기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했다. 호진도 아주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온라인 마케팅 최신 트렌드에는 뒤쳐졌을지 모르나, 마케팅의 기본 사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결국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커뮤니케이션하는 본질에는 누구보다 정통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호진이었다.

나름 인정받았다고는 하나, 그 한 줌의 위안으로 계속 몸 담기에는 지금 회사는 불안함이 많았다. 몇년 째 계속되는 적자에 분위기가 가라앉은지 오래고, 사람들은 확연히 지쳐가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사세에서 자신은 얼마만큼 살아남을 수 있을지 호진도 불안해져 갔다. 이제 젊은 시절만큼 가볍게 이질할 수도 없는 나이다. 더 이상의 회사 생활은 없을거라고 생각하면 더 암담했다. 오프라인 유통 회사의 마케팅을 거쳐 자기 사업의 기반을 만드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작게라도 온라인 기반 사업을 하긴 해야할텐데, 하지만 이 곳에서의 경험과 네트워크는 온라인과 한참 멀었다.

‘그래, 한 번 해보는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안해 하는 것보다 새로운 곳에서 깨지던, 망신당하던 배워가며 기회를 만들어 보자'

다짐한 것만으로도 희미한 자신감이 몽실거리며 떠올랐다. 이 흐름에 몸을 맡겨보자. 나쁜 흐름은 아니야. 내가 불안한 것 뿐이니까. 이런 생각에 이어 자신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해버렸는지 호진은 쓴웃음이 났다.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했던 젊은 날이 생각났다. 모두가 말릴 때도 무모하다 싶은 도전을 자초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언제부턴가 그럭저럭 보내오던 하루하루가 쌓여서 스스로 게을러진 것일까.

부장으로 진급하는 것도 중요하고, 임원이 되는 것도 좋다. 하지만 호진이 바라는 것은 ‘자신답게 일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큰 회사에 속하는 것에는 이제 큰 미련이 없었다. 네임 밸류가 있는 회사는 많이 다녀봤다. 길게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일'이 더 중요하다. 회사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호진은 익히 알고 있었다.

배워야겠다. 가서 부딪히고 좌절하더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에서 호진은 설렜다. 비록 더 이상 젊지 않더라도, 순발력이 예전만 못하더라도 스스로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계속 걸어야 한다. 나아가야 한다. 이 상태로 머무르고 싶지 않다. 이 흐름에 몸을 싣자. 흘러가보자. 아마 형식적일 테지만, 호진은 면담자리를 상상해봤다.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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