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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세 번 호진을 찾아오는 회사 후배 K의 레파토리는 항상 똑같다.
“내려가서 음료수 하나 사주세요.”
185cm 정도 키에 시원한 이목구비, 한달 전 이례적으로 30대 후반에 팀장이 된 요즘 회사의 ‘라이징 스타’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서로 많은 말을 섞지 않아도 호감이 가는 사람. K에게는 호진이 그랬고, K도 호진의 인상이 좋게 남아 있었다. 완구 카테고리를 담당하는 그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된 것은 이전 팀장 J의 급작스런 퇴사 때문이기도 했다. J와 호진은 경력사원 입사 동기였고, 동갑인 둘은 금새 경력직으로서의 속내를 서로 터놓는 친구 사이가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K 또한 J를 팀장이 아닌 마음으로 따르는 형님으로 생각했고, 꽤나 잘 지냈던 모양이다.
호진이 K와 처음으로 술 자리를 가진 날은, J가 퇴사 소식을 알린 날이기도 했다.
“오늘 술 한잔 하자”
“아무리 금요일이라지만, 5시에 번개 때리는건 너무한거 아니냐? 오늘 좀 힘든데.. 멤버는?”
“나하고 K, 걔가 너하고 소주 한잔 하고 싶다네”
“그래? K하고라면 콜. 몇 시에 나갈까?”
“어라, 이것 봐라. 바로 태세 전환하네. 서운하다 야”
“너하고는 자주 보잖아. 근데 K가 갑자기 왜? 혹시, 신상 변화라도 있는거야?”
잡힌 약속은 없었지만, 저녁에 골프 연습을 가려고 했던 호진은 K가 혹시 이직한다고 말하려는 걸까, 라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하긴 요즘 능력있는 친구들은 모두 떠나가는 분위기니까,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K는 작년에 로보트 태권V 피규어를 단독 기획하는 등, 개인적인 덕심과 사업 기획을 절묘하게 버무려 내는데 탁월한 ‘토이 전문가’로 자리잡고 있었다. K라면 업계에서는 누구나 탐낼만한 젊은 인재였다.
회사 근처 삼겹살집에 자리잡은 세 명이 소맥 첫 잔을 부딪히고 난 후 바로, 생각도 못했던 J의 퇴사 소식이 이어졌다. 나이에 비해 부장 진급도 빨랐고, 회사 내 입지도 탄탄한 편인 J의 폭탄 선언에 호진은 말 그대로 벙 쪄버렸다.
“아니, 니가 왜? 그만두고 어디로 갈건데?”
“아는 선배랑 작은 규모로 사업 시작히려고. 몇달 전부터 준비는 해왔어”
“하긴, 넌 언젠간 니껄 해야하는 성격이긴 하지... 근데 너 나가면 누가 팀장하냐?”
K가 같이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이는 아직 삼십대지만, 회사에 K만큼 완구를 오래한 사람이 없고 팀에서도 J 다음 최고참이니 다른 대안은 없을터였다. J의 계획에 이야기에 이어 대화의 주제는 K로 이어졌다. 이미 예전부터 게임과 만화, 프라모델을 좋아해왔던 K의 배경을 알게 되니 호진은 더 반가웠다. K 또한 몇년 전 호진 책상 위에 놓여졌던 건담 프라모델을 보고 호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는 이야기로 훈훈하게 이어졌다.
그날 이후 J의 퇴사와 K의 팀장 발령이 진행됐고, 호진과 K는 가끔 박카스와 사이다 등을 홀짝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누가 퇴사한다더라, 어느 임원이 요즘 어떻다더라 등 회사 돌아가는 대화로 시작하지만, 둘이 가장 좋아하고 너털웃음이 나오는 것은 역시 ‘덕심’으로 이어지는 주제였다. 거의 20년 전 게임인 대항해시대 4탄이 리마스터로 나온다는데, 예약 주문이 다 매진되어서 못 샀다는 호진의 아쉬움에 K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자기가 구해보겠다는 약속으로 호진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호진은 K를 알아갈수록 그가 속해있는 ‘덕심’의 세계가 무척이나 넓고, 전문적이라는데 놀랐다. 그가 속해있는 단톡방에는 루리웹 등 덕후 커뮤니티에서 알아주는 ‘네임드 유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살며 주말마다 레트로 게임을 득템, 리뷰 사진과 글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한 아이디의 사람의 실제를 들을 수 있었다. 프로그래머와 디자이너들과 함께 합심해서 80년대 재믹스를 복각판으로 만들어 곧 출시한다는 계획은 취미를 넘어선 사업이었다. K는 호진과는 레벨이 다른 ‘찐덕후’이자, 취미와 일을 하나로 승화시킨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이었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놀라움과 함께 호진의 마음을 찌른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재밌게 사는구나. 정말 세상은 넓구나. 나도 그 세계에 들어가면 어떨까하는 부러움. 그러나 정작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작은 슬픔. 새로운 사람들과 알아가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건 호진에게 너무 먼 일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영화는 9천원 내고 극장에서 마음 편하게 보는게 가장 좋아요”
20대에 호진은 영화일을 했었다. 업계에서 가장 큰 투자배급사의 마케터로 일했던 소감을 물어올 때면 호진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하는 대상을 일로 하는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진심이었다. 대학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호진에게 영화일은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 회사의 면접을 준비할 때 얼마나 집중했던가. PT 면접 자료를 만들던 일요일 오후, 그날의 풍경이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꿈은 누가 뺏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든 것도 자신이었다면, 그 꿈에서 스스로 벗어난 것도 호진이었다. 영화일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왜 그 일을 그만두었을까. 호진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그보다 훨씬 재미가 덜한 일을 하는 중년이 된 호진에게 꿈이란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이젠 비현실적인 것, 누군가 다른 사람이 누리는 삶이 되어 버렸다.
K와의 대화는 즐겁다. 그가 보여주는 찐덕후들의 카톡방 사진과 그들의 일화를 들을 때면 호진은 흐뭇해진다.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세계에 있음으로 왠지 호진 또한 아주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도, 꿈에서 살던 자신의 방이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그 방의 문은 닫혀 있었을지라도, 그 방에 자신이 살았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인 것이다. 그 방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리라. 그가 살았던 실제는, 역사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다시 들어갈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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