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당신은 팀장으로서 자격이 있는가’ 물어온다면, 호진은 자신이 없었다. 팀장 역할 한지 이제 4년 여가 되어 가지만, 신입 시절 생각했던 팀장의 역할과 지금 자신은 사뭇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 아이같았기에 그의 눈에 비친 팀장은 모든 걸 알고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과 인사이트로 고민을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거침없이 해결해주는 구세주같은 어른이었다.
이제는 안다. 팀장도 임원의 눈치를 봐야하는 또 한 명의 직장인일 뿐이고, 가끔은 기발하다 못해 발칙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팀원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후배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인지, 정말 잘못한 점을 고쳐주기 위한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아래 친구들은 귀신같이 눈치채곤 한다. 요즘 같은 때는 지나치게 화를 내는 한 번의 실수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그 또래들의 단톡방 가십에 오르내리며 ‘분노조절장애’라는 주홍 글씨가 낙인 찍히기 쉽상이다.
“응? 같이 좀 웃자. 뭐가 그렇게 재밌어?”
담배 피고 자리로 돌아온 호진에게 계면쩍은 얼굴로만 답하는 팀원들. 한 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팀장이 없는 자리에서는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우스개소리도 하는 것 같은데 호진이 자리에 오면 썰물처럼 그 웃음기가 사라지고 남은 공백. 호진은 해서는 안될 말을 한 것같은 그 어색함이 아직도 익숙치 않다. 팀장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서 어떻게든 대화 거리를 만들고, 먼저 일상을 물어보고 했던 것 같은데, 요즘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 팀장이 불편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알까. 팀장도 그럴수록 외로워지고, 팀원들을 불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맞은 편 앉아있는 대리의 자판 치는 소리가 빨라지더니 바로 호진 노트북 메신저 창이 깜빡인다. 온라인 광고 효율이 조금 떨어져 채널을 바꾸고 싶다는 내용이다. 앞에 있는데 말로 해도 되는데, 호진은 이젠 농담 섞인 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처음에는 영 어색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해야할까? 팀원은 메신저로 전달하고, 호진은 말로 답하는 상황이 이젠 그려려니 하는 일상이 됐다. 한 두번 말해서 변화가 없다면 더 이상은 요구하면 안되는 시대다. 그렇게 하면 강요가 되고 꼰대가 된다. 팀장 자신의 선호와 스타일을 강요하는 것은 불필요한 업무 지시로 받아들여지는 세대, MZ라고 불리우는 이들과 일하고 있다.
‘아. 재미없다. 재미없어’
삶이 재미없는 것은 회사 생활 때문이 아닐까.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호진은 대개 무미건조했다. 회의를 할 때도 준비한 대본을 기계적으로 읽듯이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열띤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려는 일은 거의 없다. 상대방의 확신에 함께 고조되어 의문을 제시하거나, 다른 대안을 내세우는 일도 없다. 사실 깊은 고민에서 나온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그냥 앉아 있다가, 주어진 일을 무난하게,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안전한 생각을, 예전에 만들어놓은 포맷 위에 붕어빵 찍어내 듯 만들어갈 뿐이다.
그 멋졌던 팀장 선배들도 실은 이랬을까. 일의 기쁨과 새로움보다는 구태의연하게 늘어지는 나날을 보낸 것이었을까.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인 것은 능력이 아니라 농축된 시간의 관록에 지나지 않았을까. 팀장이란 자리가 만든 신기루였을 뿐이었을까. 그들도 재미없었을까. 무얼할지 몰라서 불안하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서글펐을까.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오늘 하루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흘려버렸을까.
20대와 30대를 살아가고 있는 팀원들은 한창 빛나고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호진이 보기에 눈망울에 패기보다 눈치가 더 자주 스치는 그들도, 사실은 무언가 울컥하는 덩어리를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든 불태워야 할 열정을 그렇게 하루하루 연탄재로 식혀가고 있을까. 호진은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기엔 너희들이 젊음이 너무 아깝다. 너희들의 가능성을, 그 반짝반짝한 순발력을 이 조직의 나사 역할로 낭비하는 것은 죄에 가깝다. 이렇게 늙어버려 무기력해진 나를 봐다오. 한 때 그 누구보다 빛을 발했노라고 자부하는 나도 지금 이렇게 흐릿하게 꺼져가게 되버렸는데, 너희들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팀원들. 노트북을 쳐다보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내는 그들에게 머리 속으로 말을 건네던 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런 소릴 할 처지가 되나. 이제 세상 다 살아버린 것 같은, 자신의 가능성은 닫아버린 노인네 같은 소리가 아닌가. 이제 겨우 40대인 ‘아직 한창인’ 아저씨일 뿐인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아직 이룬 것도 없고 어디 내세울 경력도 만들지 못한, 출근길 전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 만명의 그저그런 중년인 내가 누굴 가르치고, 누구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을까.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 J과장이 지난 주 지시한 마케팅 예산 효율화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나? 이번 주에는 초안을 가져오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과장 정도 되면 일 머리가 생길 때지. 호진은 멍한 눈동자를 감추고 J과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저 이번주 금요일에 연차 사용하려 합니다”
왜 연차 이야기는 메신저로 하지 않고 직접 말할까. 이번에는 호진이 반대로 메신저로 ‘네 그러세요’라고 답해야 하는 것일까. 설마, 그러면 바로 오늘 저녁의 블라인드 스타로 등극하게 될텐데. 호진은 이럴 때마다 얼굴에 쓰는 ‘느긋한 미소의 자애로운 팀장 가면’을 골라 착용했다.
“그러세요. 내가 언제 연차가지고 안된다고 한 적 있나? 어디, 오늘은 안된다고 해볼까? 핫핫핫”
혼자 말하고 혼자 웃기로 궁색한 연기가 마무리된다. 재빨리 팀원들의 표정을 스캔하는 호진의 눈에 썩소와 무표정이 들어온다. 박수는 없었다.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Moves like Jagger (0) | 2021.07.29 |
---|---|
반짝이던 아침 골목 (0) | 2021.07.28 |
스승은 어디에나 있다 (0) | 2021.07.26 |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0) | 2021.07.23 |
하고 싶은 일하며 잘 먹고 잘 사는건, 가당치 않은 욕심 (0) | 2021.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