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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호진은 깨어 있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고민하던 그는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오늘을 기분좋게 보내려면 이겨내야 해. 안하면 하루 종일 내가 싫어질거야. 호진은 6시부터 문을 여는 실내 골프 연습장으로 향했다.

 

“어, 이 사람! 왜 이렇게 위험하게 치는거야! 에이 쯧”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른데도 아니고 손에 맞았잖아요!”

 

어제 아침 연습장 뒷 타석에 있던 아저씨에게 혼났다. 호진이 5번 클럽으로 휘두른 공이 평소와 다르게 잘 맞지 않았다. 잔뜩 집중해서 칠수록 공은 오른쪽으로 튀고 왼쪽으로 튀었다. 그러길 몇 차례, 결국은 사단이 났다. 왼쪽으로 크게 휘어 나간 공이 스크린을 맞고 튕겨나가 거기있던 사람에게 맞아버린 것이다. 큰 소리로 망신을 당한 호진은 더 이상 채를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최근 한달 간 연습을 소홀히 하다가 오랜만에 나왔다고는 해도, 골프를 배운지 몇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눈 앞이 하얘졌다.

 

그만하고 그냥 집에 갈까. 타석의 개인 모니터 시간을 보니 아직 45분 정도 시간은 남아 있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도망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데, 지금 나가버리면 골프에 정이 완전히 떨어질텐데. 호진은 클럽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이 상황에 지기 싫었다. 그래, 남은 시간 빈 스윙만 하지 뭐. 공만 안치면 옆 사람에게 튈까 걱정할 필요 없잖아. 7번 클럽을 잡고 처음 배웠을 때처럼 빈 스윙을 시작했다. 이 상황이 너무 쪽팔렸다. 갑자기 뭐가 문제일까에 정신이 팔려있다보니, 스윙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냥 팔만 흔드는 모양새였다. 성질을 낸 뒷 사람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힐끗 보니 이 아저씨도 오버스윙이 심한게 그리 잘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별 것도 아닌 것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고 그래, 호진은 그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공을 맞춰야 하는 부담없이 빈 스윙에 집중하는 사이, 호진은 몸의 흐름이 읽히기 시작했다. 왼쪽 어깨를 지나치게 흔드는 자신이 느껴졌다. 어깨의 움직임을 줄이니 허리가 돌기 시작했다. 골프 익히는 재미가 있던, 막 배우기 시작한 때의 기분이 흐릿하게나마 다시 찾아왔다. 그 리듬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빈 스윙을 이렇게 집중해서 한게 얼마만이지.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연습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흥건하게 땀에 젖은 호진은 떠날 준비를 마친 후 뒷 타석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허허, 나도 이해해요. 아마 생크가 나서 그런거 같은데, 그게 다 엎어쳐서 그런거야. 나도 그런 적 있어요”

 

아저씨도 미안했는지, 다시 한 번 사과하는 호진에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하하, 원래 제가 그렇게 못치지는 않는데, 덕분에 오늘 빈 스윙 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빈 스윙 필요해 보여. 여튼 열심히 합시다”

 

고집 센 얼굴에 밉상이던 그의 인상이 정겹게 보이기 시작했다. 호진은 떠나기 전 사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까 그냥 떠났다면 온 종일 부끄러움에 후회했을테지. 그리고 빈 스윙의 중요함을 다시 깨닫게 되어서 좋았어. 그래, 잘 이겨냈어. 

 

어제와 비슷한 시간, 연습장으로 들어서는 호진은 그 아저씨의 얼굴부터 찾았다. 있었다. 호진이 배정받은 타석과는 5개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속으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호진은 오늘도 빈 스윙을 집중적으로 할 계획이다. 몸의 느낌이 확실해질 때 공을 쳐도 늦지 않을터였다. 오늘도 나오길 잘했다. 골프가 다시 조금씩 좋아지기를 바랬다.

 

신입사원 시절, 호진은 논어의 한 구절을 파티션 벽에 붙여놓았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

 

배우는게 즐거운 시절이었다. 동기 중에 한 명은 호진을 ‘스폰지 같다’고 했다. 무엇이든 빨아들인다고, 학습이 빠르다는 그 칭찬을 호진은 아직도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부끄러운게 없고, 자신은 아는게 없다고 여겼던 그 시절이 아득한 요즘이다. 나이가 들어 새로운걸 받아들이는 순발력이 줄어들었지만, 어쩌면 받아들이고 빨아들이기엔 너무 많은걸 품어버린게 아닐까. 품고 있는 것 중 어떤 것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버려야 할 것일 수도 있다. 비워야 채운다는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라주고 있을까. 

 

이젠 배우는게 부끄러워진 것은 아닐까, 호진은 생각했다. 배운다는건 곧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잘하지 못한다는걸 남이 눈치챌까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골프 연습장에서 빈 스윙만 한 시간 한다는걸 남들이 볼까 신경썼던 것처럼. 이틀 전의 그 일이 아니었다면 호진은 맞지도 않는 공을 놓고 어긋난 리듬과 잘못된 자세로 팔만 흔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이가 들어서도 깨져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 면을 스스로 깨닫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자극이 있어야 한다. 일갈을 해주는 사람, 지적해주는 사람이 소중한 나이가 됐다. 그 사람이 곧 내 스승일 것이다. 다시 한 번 골프장의 그 아저씨가 고마웠다. 그런 사람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호진은 생각한다. 아니지, 더 중요한건 내 태도야. 내가 그 때 남은 시간 연습을 안하고 도망쳤다면 그냥 끝이었을거야. 움츠려선 안돼. 도망쳐선 안돼. 그냥 멈춰있으면 안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아무 말도, 아무 자극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호진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스승을 만나기 위해 움직이기로, 스승을 발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로.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나아갈 수 있게 가르쳐줄 무언가를 찾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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