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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호텔에서

은고랭이 2022. 12. 31. 16:59

그대가 서쪽의 더운 나라에 있을 지금
나는 명동의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대가 예고 없이 떠남을 알려왔을 때
나는 오래전에 예고된 유효 기간 종료를 떠올렸다

열 번의 예약에 대한 보상 쿠폰이 올해로 사라진다는 예고를 기억할 때
열 번에 걸쳐 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의 호텔을 그대와 함께 찾았음이 새삼스러웠다

서울 한복판의 호텔 방은 비좁다
마치 그대와 함께 일본을 한창 쏘다니던 그때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셋이 함께 자야 했는데 도무지 트윈룸이 없었던 건
나카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란 걸
호텔 부근에 가서야 곳곳에서 울리는 음악을 듣고서 알았다

가방을 배게 삼아 바닥에서 잤지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를 편하게 재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

사대문 안 번화가에 위치한 호텔이지만 여행 기분을 내고 싶었다
일부러 편한 지하철 대신 타지 않던 버스를 택했다
몰랐던 공간을 지나며 창가로 보이던 낯선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그럼에도 가라앉았던 기분은 기념품을 사고 나서야 풀렸다
어차피 썩어날 정도로 시간은 많았기에 발품을 팔아 교보문고에 갔을 때
좋아하는 소설가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와
좋아했던 만화의 특집판으로 편집된 만화 잡지를 골랐다

여행 기념품의 역할이 그렇듯이
이걸 볼 때마다
이렇게 보낸 올해의 마지막 날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호텔은 만 원이다
저마다의 언어로 대화하는 엘리베이터를 꽉 채운 이들은
말의 뜻은 알 수 없더라도 표정과 감정은 뚜렷하다

기대와 흥분, 거기에 약간의 나른함
열 번의 여행에서 우리의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홀로인 이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대는 비행기로 대여섯 시간의 거리에 있지만
나는 이 빈 방에서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미 닿지 않은지 오래인 우리의 거리이지만
난 여전히 그대를 생각하고 그대를 기억하고
그대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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