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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작달비

은고랭이 2023. 9. 22. 12:39

6 킬로미터 정도 뛰고 있을 때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져 눈 뜨기도 힘들어 뛰지 못할 정도였다. 집에서 막 나왔을 때는 비가 드문드문 내렸는데 낭패다 싶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그늘막이 있다. 늘 달리는 코스이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벌써 곳곳에 파여있는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밟으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하얀 천막 아래에는 나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30분 정도 달릴 준비를 한 후 집을 나선다. 집 앞 공원을 한 시간가량 뛰는데,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다. 같은 시간에 늘 공원에서 보는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대개 나이 지긋한 부부가 함께 산책을 하거나, 나처럼 뛰는 사람들이다. 그중 특이한 사람도 있는데 지금 비를 피해 들어와 있는 노인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잠이 없는 노인들이라 새벽에 공원에서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는데 그가 유독 눈에 들어온 건 항상 자전거를 옆에 두고 걸었기 때문이다. 올라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반환점을 돌아 집 방향으로 뛸 때 그는 자전거 왼쪽에서 손잡이를 두 손으로 끌며 천천히 걸어왔다. 매일 그렇게 마주쳐 지나기 시작한 게 3, 4개월 정도 되었다.

 

비는 여전히 땅을 뚫어버릴 기세로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천막 아래 두 줄로 늘어선 벤치가 모두 10개는 되었지만 그 노인과 나는 오른쪽 끝 쪽에 나란히 붙어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 옆에 큰 나무가 있어 그나마 바닥에서 튀어 올라오는 물방울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막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마치 근처에 폭포가 있는 듯했다. 그 소리에 섞여 어디에선가 희미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혹시 내가 뛸 때 끼는 골전도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싶어 확인해 봤으나 달리기를 중단하며 이어폰은 꺼놓은 상태였다. 그 소리는 옆에 있는 노인 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자전거 손잡이 부근에 작은 스피커가 매달려 있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금세 그칠 것 같진 않죠?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비가 내리는 공간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물었다.

“그렇네요. 하늘이 시커먼 것이.

“벌써 흠뻑 젖었지만 빗방울이 아파서 나갈 수가 없네요.

노인의 말에 뭐라 답할지 몰라 나도 가만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제목을 기억하려 했지만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꽤 오래전 유행했던 팝송이라는 건 분명했다. 이십여 년 전, 갓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이다. 나도 모르게 후렴구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 시절의 몇몇 풍경과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버린 얼굴들이 떠올랐다. 함께 둔탁한 감정이 가슴 언저리에서 몽실 거리며 떠올랐다. 익숙한 무게의, 이제는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저릿함 같은 거였다.

 

“노래를 잘 아는군요.

노인이 멜로디를 읊조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오랜만에 들어서요. 예전에 꽤나 좋아했습니다.

“그렇군요. 난 얼마 전에서야 이 노래를 알게 됐어요. 음악에는 워낙 취미가 없어서.

다른 곡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트럼펫으로 연주되는 재즈였다. 알지 못하는 곡이었다. 방금 전에 따라 부르던 노래도 그렇고, 이번 재즈 연주곡도 도통 노인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았다. 발목 부근에서 밑단이 몇 번 접힌 색 바랜 등산복 바지와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감추지 못한 채 몸에 꽉 끼는 검은 티셔츠, 회색 등산 조끼. 하얗게 백발이 된 긴 머리는 비에 젖어 푹 가라앉아서인지 정돈되지 않아 보였다.

 

“늘 이렇게 스피커로 음악 들으며 다니시나 봅니다. 매일 마주쳤는데도 몰랐네요.

내 말에 노인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음, 나도 그쪽 얼굴 기억하오. 열심히 뛰는 모습 보면서 젊구나, 싶었어요. 실례지만 나이가?

내 나이를 말하자 노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뛰는 겁니까?

노인이 물었다.

“네, 3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어르신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나이 때문인지 그냥 일찍 깨더라고요, 체중도 늘고 해서 한 번 뛰어볼까 싶어 시작한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젊을 때 몸 생각해서 운동하면 좋지요. 난 하고 싶어도 이제 몸이 받쳐주질 않아서.

“이 시간에 뵌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요. 이 근처 사십니까?

“오래 살았죠. 아들 국민학교 때 여기로 이사 왔으니까 30년 정도 되었으려나. 이 공원은 집 근처인데도 요즘에서야 나오게 됐소. 사는 게 뭐가 그리 급했는지.

노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봤다. 비는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줄어드니 음악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바이올린 음색의 클래식 곡이었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에 걸려있던 스피커를 가져와 다시 앉았다.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휴대용이었다. 유명 브랜드는 아닌 듯 생소한 로고가 동그란 모양의 중앙에 새겨 있었다.

“이 노래들은 여기 저장된 것들이라오.

노인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등산복 조끼 주머니에서 꺼냈다. 고가의 모델이었다. 내 의외의 눈빛을 눈치챈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아들 거요. 죽어 버린.

 

남부럽지 않게 키운 아들이라고 했다. 크게 속 썩인 적 없이 잘 커줬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용돈도 넉넉히 챙겨준 효자였던 아들. 결혼을 하지 않고 마흔 넘어까지 혼자 지낸 것이 유일한 불만이었다. 지방 도시로 전근을 가고 나서도 주말이면 부모님 댁을 찾았던 아들이 소식도 없이 집에 오지 않았던 어느 토요일. 대신 연락을 보내온 곳은 아들이 지내는 도시의 어느 병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차에 치었다고 했소. 대낮에 만취 운전자라 신호가 바뀐 걸 못 보고 그냥 과속을 했다나. 하필이면 그 횡단보도에, 그 시간에 아들이 지나고 있던 거였소.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았으면 피할 수 있었을 지도.

이슬비 정도로 빗줄기가 줄어들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더 선명해졌다.

“신기하게도 몸 어디가 부러지거나 피가 많이 난 것도 아니었소. 머리에 안 좋은 충격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죽을 수 있다 하더군요. 이 전화기도 멀쩡했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노인은 이 나이가 되도록 난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왜 아침마다 타지도 않을 자전거를 끌고 나오시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노인이 인사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아들이 마지막에 무슨 노래를 들었을까. 자전거를 타고 어떤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었을까. 더 이상 녀석이 이 세상에 없다는 슬픔은 어찌어찌 가라앉혔다 해도, 다른 무엇보다 그 생각을 하면 잠을 잘 수도, 뭘 먹을 수도 없겠더군요. 그래서 이렇게나마 종일 다니는 거지. 자전거는 못 타도 가지고라도 걷기 시작했소. 그러다 보면 배가 고파지기도 하고, 종일 돌아다니니 피곤해서 토막잠이라도 잘 수 있습디다.

 

노인이 떠나고 난 후 잠시 더 앉아 있다가 일어나 집 쪽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의 스피커에서 나왔던, 따라서 흥얼거리던 곡의 이름이 기억났다. 멈춰 서서 휴대폰 음악 앱으로 검색한 후 이번에는 내 이어폰으로 다시 한번 들었다. 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 부분은 가사도 기억났다. 1곡 반복 재생으로 설정하고 작은 소리로 따라 부르며 천천히 걸었다. 부모님 댁의 내 방 어딘가에 그때 산 CD가 여전히 있기를. 이번 주말에는 CD도 찾을 겸 하루 자고 오겠다고 전화를 드려야지. 지금은 아직 시간이 이르니, 조금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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