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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었다. 눈을 감으면 귓가에 날카로운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이게 뭐지? 진짜 미개한 방식으로 일하네”라며 이죽거리는 실장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는 녹슨 철문을 닫을 때 나는 그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커졌다. 안색이 어둡다며 어디 아프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 물어오는 그들도 내가 보기엔 그다지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들 눈 밑이 검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다.

더 이상 나는 손이 빠르지 않았다. 예전처럼 마우스와 디지털 펜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AI 프로그램만을 사용해야 했다. 독수리 타법으로 입력하는 영어는 몇 번이나 철자가 틀려 프로그램이 인식하지 못했고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그림은 내게 주어진 디자인 방향과 어긋나 있기 일쑤였다.

실장은 예전처럼 시안을 들고 오기만 기다리지 않았다. 돌아다니며 우리가 작업 중인 모니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따위로 하면서 돈 받을 용기가 생기나 보네요”라는 말은 친절한 축에 속했다. 자기 방에서 가까운 모니터부터 시작해 하나씩 옮겨오기 때문에 언제가 내 순서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휴. 말을 말아야지. 진짜 쓰레기처럼 일하네”라는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질 때면 숨이 막혀 눈앞이 하얘진 적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왜 스스로 거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의아해진다. 실장의 폭언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던 여자 직원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연달아 그만두기 시작했다. 비아냥 중에 가끔 던지던 “그래도 이쪽은 조금 덜 미련하네. 머리를 쓰긴 하나 보군요”라는 말이 주는 안도 때문이었을까. 들어가기 어렵다는 4년제 미대를 나왔다는 그의 배경에, 이름도 모를 2년제를 나온 나 따위와는 다른 사람이라며 그에게 지배받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던 걸까.

하루에 두 번, 실장의 업무 시찰이 끝나고 나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곤 했다.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귓가에 들리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더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라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예상치 못한 세 번째 점검이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마음에 드는 작업 결과물이 모니터에 띄워져 있었다. 오호, 하는 실장의 감탄이 등 뒤에서 들렸다. 잘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옆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듣보잡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웬일이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에서 비가 몇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귓속으로 꽂혀 들어오던 이명은 사라져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건물 옆에 차도가 있어 늘 시끄러웠으나 지금은 사방이 마치 새하얀 백지로 둘러싸인 것처럼 고요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옥상을 가로질러 건물 끝의 난간을 잡고 그 위로 올라갔다. 더 이상 디딜 곳이 없는 허공을 향해 또 한 발을 내디뎠다. 기억하는 건 어딘가에 몸이 걸려 휘청하고 흔들린 것과 뒤이어 왼쪽 무릎에 뜨거운 불을 끼얹은 것 같은 강한 통증이었다.

 

경찰이 병원에 몇 번 다녀갔다. 자살 미수로 사건이 접수되었다고 했다. 만화의 한 장면처럼 5층에서 떨어지다가 건물 옆 나뭇가지에 걸렸기에 망정이지 왼쪽 다리 복합 골절로 그치지 않고 즉사했을 거라고 했다. 죽을 생각까지는 없어서 나무가 많은 그쪽에서 떨어졌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그때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직장 내 괴롭힘 건으로 회사에 조사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병문안을 온 동료들을 통해서 들었다. 뒤이어 본사의 인사부 사람이라는 몇 명이 와서 퇴직 절차를 안내해 줬다. 적지 않은 액수의 퇴직금과 위로금을 제시하며 어떤 경우에도 회사 상대로 민형사상의 고소를 하지 않겠다는 약정서에 서명할 것을 은근히 요구해왔다. 그곳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바로 사인을 했다.

두어 달 더 입원하다가 퇴원했다. 골절된 무릎은 완치되지 않아 오른쪽보다 왼쪽 다리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내게 남은 건 맨 앞자리 숫자가 하나 늘어난 통장 잔고와 3급 장애 등급이었다.

 

영감님이 다 보고 옆으로 치워 놓은 신문을 내가 가져다 읽었다. 그는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었으나 난 눈에 들어오는 기사 제목 중 관심이 가는 것만 골라서 대충 훑어봤다. 다음 번 신문이 건네지기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는 도서관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요즘 이 동네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철물 공장과 목공소가 한데 늘어선 동네였다. 거기서 나오는 폐자재를 처리하는 고물상까지 군데군데 있었기 때문에 서울이라고 해도 그리 살만한 곳이 못 되었다. 세월의 변화를 이기지 못한 작은 공장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한 이후로 동네 풍경은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중고생들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거나 싸움질을 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폐업한 공장 중 꽤 규모가 큰 곳에 카페가 들어서면서 동네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 건물 구조를 그대로 쓴 폐허 같은 분위기인데도 젊은 사람들이 앞에 줄을 서 있는 걸 보고는 주민들이 이상한 일도 다 있다며 갸우뚱하던 것도 잠시, 비어있는 목공소와 공장에 비슷한 카페며 술집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왔고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사 먹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요즘 뜨는동네가 되었다.

 

무리 지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도서관 안으로 들려올 때면 노인들은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가 오늘과 다르지 않던 평온한 공간이 ‘되 먹지 못한 어린놈들’ 때문에 망가지고 있다는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가끔은 불청객이 안으로 난입할 때도 있었다. “헐 대박. 이런 데 도서관이 있었네”, “그런데 되게 작다” 등 자기들끼리는 작게 한다는 대화 소리가 열람실 안의 모두에게 들리는 때가 잦았고 그럴 때면 바로 노인 중 한 명의 꼬장꼬장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난 나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살던 동네가 탁한 무채색에서 화사한 색감으로 물들어 가는 게 보기 좋았다. 책을 읽으러 온 건지, 아니면 그저 약속 시간까지 있을 데가 없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러 온 건지 모를 이들이 들어와 있는 걸 쳐다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 지난 고통이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안온하면서도 알록달록한 삶을 살고 있구나. 세상 전체가 내가 겪었던 악의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라는 위안을 받았다.

 

금요일인 오늘부터 주말 동안 무슨 축제가 있다고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더니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도서관 근처 놀이터에 설치된 무대에서 연주되는 기타와 드럼 소리가 열람실 안으로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몇몇 노인들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고개를 절래절레 흔들며 일찍 자리를 떴다. 신문을 읽던 영감님도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구먼. 우리도 이만 일어날까”라고 내게 말했다. 항상 도서관 문이 닫히는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던 양반이었기에 적지 않아 놀랐다. “뭐 하시려고요?”라고 묻자 그는 “날씨도 좋으니 산책이나 하자고”라며 빙긋 웃고는 펼쳐져 있는 신문을 접고는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느긋하게 걸었다. 원래 발걸음이 느린 편인지, 아니면 왼쪽 다리가 불편한 나를 배려해 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뒷짐을 지고는 별말 없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큰 길은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푸드 트럭에서 닭꼬치 굽는 연기와 피자 냄새 같은 달큼한 토마토소스 향이 섞여 맴돌았고 사람들을 피해 걸어야 할 만큼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 낡은 주택 단지와 빌라가 있는 작은 옆길로 들어갔다.

“영감님은 여기서 오래 사셨나요?

“그럼. 어려서부터.

“그러셨군요. 저도 초등학교 때부터 쭉 여기서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며 가며 뵌 적이 없네요.

“여기가 작은 동네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이야 도서관에서 마주치다 보니까 이렇게 됐지, 그전에는 지나쳤다 해도 서로 신경이나 썼겠나.

그렇게 띄엄띄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나는 가족들은 모두 외국에 있으며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 혼자 있다고 했지만 그는 자기 식구에 대해 별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신문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문 읽는 걸 좋아하시나. 기자이셨냐고 묻자 자기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 같더니만 어느 커다란 철문 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면서 나를 보고 말했다.

“여기가 내 밥벌이하는 일터이자 살림하는 곳이네. 볕도 좋은데 들어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자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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