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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약속 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었다. 다시 보게 될 얼굴들이 기대되면서도 한 편으로 쑥스러웠다. 먼저 도착해서 한 명씩 올 때마다 인사하기보다 차라리 조금 늦게 가서 다들 모여 있을 때 한 번에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가끔 부모님을 뵈러 들렸을 때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기에 느긋하게 여기를 거닐어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살던 집은 허물어졌고 철제 기둥 사이로 펼쳐진 회색 천막이 집 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택을 매입한 사람이 다세대 건물을 올릴 거라고 하더니만 벌써 공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당 양쪽에 서 있던 목련 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네 골목의 구조는 그대로였으나 기억에 남아있는 가게들은 보이지 않았다. 성당 가는 길에 있던 초등학교 앞 문방구들도 없어졌다. 요즘 아이들은 학용품을 어디서 사는 걸까. 매월 말이면 영화 잡지가 나왔나 들렀던 서점 자리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요즘은 어딜 가도 서점 찾기가 쉽지 않다. 변해 버린 공간에서 추억을 되새기다 보니 옮기는 발걸음마다 서운함이 조금씩 묻어 나왔다.

감자탕 집 앞에 왔을 때 수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뭐야. 다들 와 있는데”라는 말이 전화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테이블 두 개가 붙어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 모습을 발견한 수연이 손을 들어 흔들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복사단을 같이 했던 선배 몇 명과 청년부 활동에서 낯이 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했던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어중간한 미소 때문인지 턱 주변 근육에 경련이 왔다.
“지후야.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겨주었고 몇몇은 악수를 청해 오기도 했다. 내 이름 기억하냐며 술잔을 채워주는 사람, 넌 하나도 안 변했다며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 주일은 지키고 있냐고 묻는 사람들까지 정신없이 있다 보니 처음에 가졌던 긴장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나에게 쏠렸던 관심이 사그라들고 근처에 앉아 있는 두 세명 사이의 대화가 시작되며 조용해지기 시작할 무렵 명수 형이 내 옆의 빈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어떻게 지냈냐.”
“조그만 가게 하면서 나름 평화롭고 살고 있어요. 형은요?”
“나도 그럭저럭. 평범한 월급쟁이 중년이 됐지 뭐. 초등학생 딸 둘 있고.”
5학년이었던 내게 중학생 복사단장 명수 형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마치 어른과 같은 존재였다. 대학생이 되어 청년부 활동을 같이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청년부장을 맡아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였으나 나는 중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1년 동안 맡아본 게 다였고 그나마 그 역할을 겨우 마친 후에는 가끔 얼굴만 내밀었을 뿐 겉에서 맴도는 아웃사이더와 다를 바 없었다.
“벌써 애가 초등학생에요? 그러고 보니 형 결혼식도 못 갔네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언제 적 이야기인데. 그때 너 영화 일하느라 집에도 잘 못 들어온다고 어머님이 이야기해 주셨어. 그런데 이제 영화는 접었다면서. 아쉽다. 넌 그쪽으로 잘 될 거 같았는데.”
“그렇게 됐네요. 후회는 없어요.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해봤으니까요. 그런데 형.”
결혼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혜은이 누나였는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몇 번이나 주변을 살펴봤지만 수연이 했던 말과 달리 일행 중에 누나는 없었다.
“응, 왜?”
“아니에요. 만나서 좋다고요.”

이제 엄마, 아빠가 되어 만난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난 시간의 흔적이 엿보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도 아이들 학원 이야기, 어디가 학군이 좋다는 이야기부터 주식 투자, 회사를 그만둔 후의 생계 등 우리 나이 또래가 흔히 할 법한 것들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의 길을 택한 복사단 동갑 승현이는 지금 바티칸에 연수를 가 있다는 근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긴 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꿈꾸었던 시절의 분위기는 희미해져 있었다. 하지만 다들 이렇게 지내는 모습도 나름의 은총이지 않을까 싶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수연이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애절한 눈빛 어쩔 거야. 눈물이 글썽하네. 그렇게 보고 싶어?”
“다들 이렇게 보니까 좋아서 그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언니 안 와서 서운한 거 아니냐고.”
수연이 옆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모임 막 시작하고 연락이 왔는데, 아이가 갑자기 감기가 걸려서 오늘 못 나온대. 다음에 너랑 꼭 자리 만들자고 하더라고.”
“외국 있다가 잠깐 들어왔다면서. 이제 시간 없는 거 아니야?”
혜은 누나가 못 온다는 것보다 아이가 있다는 말이 반복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명수 형하고는 아니지만 결혼 했구나.
“꽤 오래 있을 것 같던데. 올해 안식년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언니 미국 대학교에서 가르치거든.”
“넌 어떻게 그렇게 누나 소식을 잘 아냐.”
“아. 몇 년 전에 국제 학회 콘퍼런스에 통역을 갔는데, 거기 언니가 온 거야. 그때부터 서로 연락하고 지내.”
“아이가 있다는 건 누나도 결혼했다는 거네.”
“정지후, 궁금해 죽을 것 같은 마음은 알겠다만, 언니한테 직접 들어. 곧 만나게 해줄 테니까.”
수연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짓다가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검지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참, 지난번 그 시디. 아직도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있는 디브이디 플레이어로 돌려봤는데, 오랫동안 안 틀어서 고장 났나 봐. 수리 맡겨놨거든. 찾아오면 보고 나서 말해줄게.”

아직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은 수연뿐이었기에 자리가 파하고는 모두 귀가를 서둘렀다.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으로 삼삼오오 떠난 후에 수연이 맥주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너도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뭐라 할 사람 없지 않냐는 말을 할 때의 표정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넌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앞에 놓인 반건조 오징어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맥주잔만 기울이던 수연이 물었다.
“뭘 어떻게 해. 그냥 열심히 사는 거지.”
“열심히 뭘? 남들 안경 맞춰주면서?”
“안경점이 뭐 어때서.”
내가 발끈하며 대꾸하자 수연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가슴께로 가져갔다.
“지금 하는 일이 안 좋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네 젊음을 바친 영화, 이대로 영영 떠나보낼 거냐고. 너 예전에는 허황된 얘기를 하는 것 같아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뭔가 빛나 보였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정작 중요한 걸 어딘가에 놓고 온 사람처럼 보여.”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봤어. 그런데 안 된 걸 어떻게 해.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는 건 미련이라고.”
“지후야. 나 매년 부산 영화제에 통역하러 가거든. 그러다가 그쪽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는데. 너, 감독 되는 꿈은 버렸다 하더라도 시나리오는 쓸 수 있잖아.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야기를 만들면 되잖아. 실력 있는 작가가 되면 감독 못지않은 것 같던데. 내 말이 틀려?”
말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실은 조금씩 쓰고 있다고. 손님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그 무료한 시간 동안 안경점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어두운 방에서 하얗게 빛나는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며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그렇게 완성된 시나리오가 몇 편은 되었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다. 무서웠다. 또다시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놓아버린 꿈에서 미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바둥거리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수연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서인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고는 바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긴 후에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언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들 이해해 줬어요. 참, 아이 감기는 어때요? 그래요? 다행이다.”
통화 중인 수연의 시선은 계속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지금은 자리 마쳤고요. 지후랑 둘이서 맥주 한잔하고 있어요. 네? 정말요? 좋죠. 잠깐만요.”
핸드폰 마이크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는 수연이 말했다.
“혜은이 언닌데. 지금 나올 수 있대. 여기로 오라고 할까?”
“뭐? 누나가? 아이 아파서 못 나온다면서.”
“열은 많이 내렸고 지금은 자고 있대. 친정 엄마가 봐 주기로 하셨고. 너랑 있다고 하니까 얼굴 보고 싶다는데.”
혜은 누나가 못 온다고 했을 때 아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심했었다. 서로 변한 모습을 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의 이런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뭐라 말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수연이 입술을 비쭉 내밀고는 다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지후도 좋다네요.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죠? 주소 톡으로 보내드릴게요. 이따 봬요.”
통화를 마친 후 수연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이렇게 된 거 만나보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너 오늘 밤에 잠 못 자고 계속 후회할 거 같아서 이 누나가 추진력 있게 밀어준 거야.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그래. 고맙다.”
수연이 말대로 오히려 홀가분했다. 술잔을 들어 맥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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