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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비홍의 주제곡이 다시 들릴 거라 생각했지만 둥두둥 하는 북소리는 없었다. 혜은 누나는 두꺼운 검은색 뿔테안경을 꼈고 머리는 요즘 남자 아이돌 가수를 연상시키는 쇼트커트로 다듬어져 있었다. 기억 속의 늘 여성스러웠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슬림 하게 딱 붙는 블랙진에 검은 가죽 재질의 라이더 재킷을 걸쳤고 목에는 흰색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 활동적인 스타트업 대표처럼 보였다. 맞은편에 앉아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지은 미소만이 예전의 누나를 아련하게 기억나게 했다.

 

“지후. 이제 어른이 다 됐네.”

“네. 누나 오랜만이에요. 몰라보겠어요.”

“얘는. 그런 말은 실례야. 예전하고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그래야지. 언니도 그래요. 얘도 마흔 넘었는데 어른이 됐다니. 그럼 지후가 예전에는 꼬맹이였다는 건가?”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날 도우려는지 수연이는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수다를 늘어놓았다. 누나는 석사까지 마친 후 유학을 갔고 그 후로 계속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보스턴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번에 안식년을 받아 오랜만에 돌아와 있는 중이었다.

“형부는 왜 같이 안 왔어요?”

“응. 이번에 나만 안식년 받았거든. 곧 학기 끝나면 그 사람도 방학 때 잠깐 올 거야.”

“누나 결혼한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지후야 그때 연락이 닿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렇게라도 보니까 좋네. 어떻게 지내고 있니?”

 

근황을 설명하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정해진 시나리오가 있다. 수연에게 한 번, 그리고 아까 모임에서 두 번 해보고 나니 더 짧게 전할 수 있었다. 누나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누나가 건네온 첫 질문은 의외였다. 이루지 못 한 꿈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좋은 사람은 있고?”

“아니요. 아직 제 앞가림 하기 바빠서요.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요.”

누나는 그렇구나, 작게 중얼거린 후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명수 형과 대학생 때까지도 사귀고 있었는데 언제 헤어진 걸까,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물어보고 싶다가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입을 다문 채 있었고 셋 주위에 갑자기 적막이 찾아왔다. 잠시 후 수연이 목을 가다듬고 나서 말했다.

“언니한테 이제는 물어봐도 되겠다.” 

“응 뭔데?” 

누나가 시선을 수연 쪽으로 돌렸을 때 녀석은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애가 언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버렸다. 날 바라본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야. 그게 무슨..”

“맞잖아. 너 언니 좋아했던 거. 이제 이 정도 시간 지났으면 서로 밝혀도 되는 거 아니야?”

얼굴이 시뻘게진 나와 달리 누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지금 모습과 잘 어울렸다.

“그럼. 알고 있었지.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겠니.” 누나 얼굴에 미소가 여전히 피어 있었다. 

“언제부터요?” 물어보는 내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저 아래 제대에 있는 복사 아이가 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

누나는 옆에 앉아 있는 수연이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 옆에 복사복을 입고 같이 서 있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자기를 째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

“뭐야. 언니한테 들켰구나.” 수연이가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얘가 왜 이렇게 멍하게 있나 싶었죠. 난 매번 긴장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알았죠. 아, 오르간 치는 언니한테 푹 빠졌구나. 근데 혼자 끙끙대며 속앓이만 하고 있는 게 더 웃기더라고요. 그렇게 거의 십 년을 짝사랑만 해 왔으니. 하긴 그때 언니는 명수 오빠랑 사귀고 있었으니, 이 소심한 인간이 뭘 하고 말고도 없었겠네.”

“누나, 명수 형하고는 왜 헤어진 거예요?” 수연이가 말을 꺼내준 덕에 물어볼 수 있었다.

“지후 네가 청년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거야. 안 좋은 일로 헤어진 건 아니었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우리 관계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중학교 때부터 사귀게 된 건 성당에서 계속 마주치면서 갖게 된 동지애 같은 거였어. 함께 있으면 편했고 서로 채워주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감정이 사랑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그럼 만약, 그때 지후가 고백했다면, 언니는 받아들였을까요?”

차마 내가 묻기 어려운 말을 수연이 대신해줬다.

 

“글쎄. 그랬을 지도?” 

누나의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 걸. 지후가 나한테 고백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누나의 눈썹 사이에 작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지후가 사랑하는 대상은 따로 있었어.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 그리고 나를 향한 마음 또한 사랑이 아니라는 게 꽤나 명확하게 보였어. 그건 뭐랄까. 동경 같은 거였다고 할 수 있을까. 

한 번 지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내가 연주하는 오르간을 들으면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 것 같다고. 복사 설 때마다 내 연주를 들으면서 그걸 실감할 수 있었다고. 그 말 때문이었을 거야. 감정의 크기와는 별개로, 나라는 사람 자체를 강하게 원하는 그런 마음은 아니구나.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가 사랑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깨달을 때가 올 거라 생각했어.”

“그럼 얘가 사랑하는 건 뭐였는데요?”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니. 본인만이 알겠지.”

수연의 물음에 누나는 싱긋 웃고는 맥주잔을 들었다.

 

누나를 만나고 돌아왔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사랑한 건 무엇이었을까.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건 영화였다. 사랑하는 대상을 넘어 인생을 걸고자 했던 대상이었으니. 연애보다는 꿈을 선택했을 거란 뜻이었을까.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커튼 콜을 위해 무대 뒤에 서 있는 배우들처럼 그 안에 뭔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느낌이 바람이 불 때면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작은 종처럼 머릿속을 계속 어지럽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핸드폰에 수연이의 이름이 보였다.

“여보세요.”

이번에도 뭔가 호들갑을 떨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기로 들려오는 건 숨을 들이켜는 듯한 거친 소리뿐이었다.

“서수연. 왜. 전화했으면 말을 해.”

“너.”

“응. 말해.”

늘 통통 튀는 듯한 수연이의 목소리가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나한테 준 거야.”

“뭐 말인데. 아, 시디? 그거 봤구나?”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고친 다더니 이제야 봤나 싶었다. 어땠냐고, 감동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너 진짜 잔인한 놈이다”라며 수연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잔인하다고?

“왜 편집을 너무 성의 없이 해서? 그거야 그때 네 장면만 모아서 급하게 하느라…”

“그 말이 아니잖아. 넌 잔인한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멍청한 거니? 자기가 이걸 왜 만들었는지도 잊은 거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의 이름이 쓰인 시디에 들어 있는 건 내가 찍고 편집한 영상 한 편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걸 얼마 전에 시디를 틀어보고 나서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여한 성당 청년부 여름 수련회에서 내 역할은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영화 촬영에 열심인 걸 모두가 알고 있었고, 성당에 드문드문 얼굴만 내밀던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다. 디지털 캠코더를 들고 돌아다니며 출발하기 전부터 돌아와서 해산하기까지의 과정을 부지런히 찍었다. 앉아서 쉴 시간도 없이 찍어대느라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었다. 이걸로나마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미리 정해놓은 시나리오 없이 시작했지만 수련회 중에 밤잠을 줄여가며 플롯을 구상했고 청년부 모두의 인터뷰를 따 놓기도 했다.

한껏 울어버린 뒤풀이에서 사람들의 응원을 받은 후에는 이게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에 후반 편집에도 꽤 공을 들였다. 어울리는 배경 음악을 찾았고 인터뷰 부분에는 자막을 꼼꼼하게 넣었다. 완성본을 보고 나서는 스스로 감동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짧은 영상 하나를 더 만들고 싶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수연이가 나오는 촬영분이 많아서였을까. 하긴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내게 와서는 뭐 찍고 있냐며 계속 귀찮게 하더니 그래서 영상에 자주 걸렸을지도 몰랐다. 공식 영상을 편집하던 중에 따로 모아놓은 수연이 클립만 모아 툭툭 연결하듯 짧은 한 편을 완성했다. 그걸 시디로 굽고 서수연이라고 써 놓았다. 하지만 쑥스러워서였는지 그대로 공시디 케이스에 넣어놓은 걸 이제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왜 만들긴, 네 이름 적혀 있잖아. 너 선물로 만든 거지 뭐.”

피식 웃은 내 말에 수화기 너머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만들었을 때의 자기 마음도. 그리고 이걸 볼 때의 내 마음도.”

기분이 상했다. 시간을 내서 자기 영상을 만들었고,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선물로 전해줘서 옛 추억을 되살리게 해줬는데도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아무런 대꾸가 없자 수연이 얕은 한숨과 함께 내뱉듯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기억해 봐. 정말 날 찍은 게 맞는지. 아니면 정작 찍고 싶은 건 따로 있었는지.”

 

잠시 후 카톡 알림음이 들렸다. 수연이가 보낸 것이었다. 동영상 파일 하나와 짧은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 You broke my heart, again.

 

핸드폰으로 티브이 화면을 찍었는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시디에 들어있는 영상의 일부분이었다. 자기가 한 말을 직접 보고 깨달으라는 뜻이 분명했다.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정작 찍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니. 

영상 안에서 수연이는 짐을 옮기며 낑낑댔고, 식사 담당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국을 끓였다. 인터뷰 영상을 따다가 말이 꼬여서 다시 할게,라며 부끄러워하는 NG 컷도 나왔다. 

 

두 번째로 돌려볼 때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장면에서 수연이의 뒤쪽에 걸려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제서야 이 영상을 골라 편집했던 때의 나 자신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왜 이 장면들을 찍었고, 왜 이것들만 모아 한 편으로 편집했는지. 흐릿한 시야가 안경을 끼고 나서 선명해지는 것처럼 그때의 생각과 마음이 명확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동시에 긴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수연과 함께 영상에 들어있던 사람은 혜은 누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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