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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공지가 올라왔다. 지난번 성당 사람들과의 만남 때 연락처를 교환한 후 단톡방에 초대받았다. 이번에도 장소는 감자탕 집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했다. 바티칸으로 파견 근무를 갔던 김승현 루카 신부님이 오 년 만에 귀국한 걸 축하하는 모임이었다. 같이 복사를 섰던 동갑내기 승현이 이야기였다. 사제가 된 사람에게는 개인적 친분과 관계없이 이렇게 존칭을 하는구나 싶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외박을 나올 때나 방학 때면 승현이는 사복으로 갈아입고는 우리들과 곧잘 어울리곤 했었는데. 참석자 투표에 나도 체크를 했다.
 
수연이는 그날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카톡으로 말을 걸어도 ‘1’ 표시는 사라졌지만 답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녀석의 이름이 쓰인 시디에 들어있는 건 정작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었으니.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선물이라고 전해 준 내가 용서받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모든 게 기억났다. 그때까지도 난 혜은이 누나를 향한 마음을 접어두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 수련회 현장을 촬영하면서 어떻게든 누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카메라를 들이밀 용기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걸 찍는 척하면서 파인더에 누나가 들어오도록 남몰래 애를 썼다. 편하게 카메라를 향할 수 있는 상대가 수연이었고 당연히 녀석이 담긴 영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내 시선이 향한 건 화면 구석에 있는 누나였다. 수줍음을 숨기기 위한 도구로 수연이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완성된 영상을 시디로 굽고 나서도 누구에게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가 간직하기 위해서 만들었음에도 그 위에 누나의 이름을 적지 못할 정도로 난 비겁했다.
그 사실을 시간이 이십 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까맣게 잊고 말았다. 우연히 시디를 발견했을 때는 이름이 쓰인 사람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겠거니 하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무신경하고 미련한 내 착각으로 수연이에게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돌아온 승현이를 환영하는 모임에 수연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빠진 때문인지, 아니면 사제가 된 친구가 있어서인지 지난번보다 분위기는 차분했다. 늘 동그란 안경을 끼고 큰 키에 마른 편이었던 승현이는 풍채가 훨씬 좋아져 있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루카 신부님이라고 부르다가 편하게 대해 달라는 승현이의 말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 격의 없이 대하기 시작했다. 하긴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대학 생활을 1년 동안 할 때 녀석은 술도 잘 마시고 데스 메탈 같은 음악을 즐겨 듣곤 했었다.
음식점 밖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막 문을 열고 나오는 승현이와 마주쳤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길이라며 내게 같이 바람이나 쐬자고 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근데 너 담배 안 피우지 않았나?”
“그러게. 어쩌다 보니 배우게 됐다. 신부님 중에도 흡연자 꽤 많아.”
“하긴. 예전 본당 신부님도 완전 골초셨잖아.”
“넌 예전 모습 그대로구나. 대학생 때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시간이 많이 지났네. 넌 모임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응. 얼마 전부터 수연이랑 연락이 다시 되었거든. 걔가 데리고 나와줘서.”
“그러게. 수연이.”
승현이 담배 연기를 아래로 흘려내리면서 잠시 콧잔등을 긁은 후에 말을 이었다.
“우리 중에서, 명수 형하고 혜은이 누나는 잘 안될 거 알고 있었어. 내가 그런 쪽으로 촉이 꽤 좋거든.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해서인지 몰라도.”
피식 웃는 나를 보고는 승현도 함께 미소 지었다.
“그런데 너희는 안 맞았단 말이야.”
“너희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누구는 누구야. 너랑 수연이지. 너네 둘이 결국은 이어질 거라고 확신했는데 말이야.”
승현이는 뻔한 걸 굳이 왜 물어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와서도 옆으로 나란히 앉아 대화를 계속했다. 승현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내 표정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너 정말 몰랐어? 우리 모두 알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말하기는 부끄러운데. 사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건…”
“알아. 너 중학교 때부터 혜은이 누나 좋아했던 거. 근데 또 그만큼 티가 났던 게 수연이가 너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거였거든. 이제 보니 너만 모르고 있었던 거네. 이 미련한 자야. 오, 주여.”
신부님이 이렇게 막 농담처럼 주님을 불러도 되나 싶어 이 와중에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승현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너네 둘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말이지. 누구 못지않게 수연이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바로 너였기 때문이야. 네가 혜은이 누나를 좋아하는 건 사춘기 소년 때부터 가져온 환상 아니면 동경이었어. 거기서 깨어나는 건 시간문제였고. 네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바로 곁에서 널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 생각했지.”
 
승현이는 언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도 말해줬다. 신학교에 들어가고 첫 여름 방학 때 녀석이 우리 집에서 하루 자고 간 날이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들끼리 술을 꽤 많이 마시고 난 후, 취해서 집에 들어가면 신학생이 엉망으로 하고 다닌다며 부모님께 혼날 게 뻔하다고 재워달라고 했다. 우리는 캔맥주를 몇 개 사서 내 방으로 들어와서는 또 마셨다. 그때 내가 틀어준 음악을 들었던 때였다고 했다. 나도 그 밤의 풍경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곡 하나하나가 좋았거든.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죽이는 곡들로만 골라 놨다고. 그랬더니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응. 수연이한테 주려고 모아놓은 거라고.”
“맞아. 걔가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했지. 네가 모니터로 MP3 파일 모아놓은 폴더도 보여줬잖아. 꽤 낯간지러운 제목이었는데.”
승현의 말을 들으며 노란색 폴더 안에 내가 입력해 놓은 문구가 또렷이 떠올랐다.
[두 시간 오 분 뒤면 넌 외롭지 않을 거야]
 
집으로 돌아와 지난번에 방 정리하고 가져온 박스를 열었다. 대학생 때 쓰던 컴퓨터에서 떼어 온 하드디스크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음악 폴더를 열어보니 그 시절 다운로드 해서 모아놓은 앨범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화면을 스크롤 하며 그 폴더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는 MSN 같은 컴퓨터 메신저를 한창 사용했었다. 수연이 하고도 자주 메신저로 이야기했다. 별다른 대화는 아니었다. 사는 이야기. 오늘 봤던 영화 이야기. 짜증 났던 일 같은 것들이었다.
한 번은 수연이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이었다. 그날은 밤이었는데도 열어놓은 창으로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대화가 잠시 끊겨 있던 중에 새 폴더를 만들어 놓고 당시 즐겨 듣던 음악 중에 몇 개를 고른 후에 복사해서 모으기 시작했다.
기분 좋아질 것 같은 노래, 감미로운 노래, 달콤한 가사가 담겨 있는 노래들. 스무 곡 가까이 담겼을 때 폴더 명을 ‘서수연 힘내’라고 바꾼 뒤 압축 프로그램으로 변경한 ZIP 파일을 메신저에 올렸다. 파일 용량이 커서인지 전송에 걸리는 시간이 두 시간 오 분으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채팅으로 수연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 이제 두 시간 오 분 뒤면 넌 외롭지 않을 거야. 힘내라, 서수연.
 
그 사이 잠들었는지 수연이는 답이 없었다. 나도 컴퓨터를 켜 놓고 밤사이에 전송이 완료될 거라 생각하고는 침대로 가서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정오가 다 되어 눈이 떠졌다. 메신저 창에는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새벽 4시경에 올라와 있었고 수연이는 메시지 한 줄을 남겨 놓고 로그아웃했다. ‘고마운 놈. 그리고 나쁜 놈’이라는 말이었다.
 
“자, 어떠세요? 공간은 이전 모델보다 절반 밖에 안 차지하지만 성능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시력 검사기 업체 영업 사원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 훈련된 듯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와 옷차림새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가는 인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 검사기가 이유 없이 꺼지기도 했고 요즘 들어 소음도 커진 듯해 바꿀 때가 되긴 했다. 매뉴얼을 설명 듣다 보니 조작 방법도 훨씬 더 간편해졌다. 이 작은 안경점에도 기술 진보의 손길이 착실하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이 실감 났다.
재미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며 내게 시력 검사를 하는 손님이라고 생각하고는 눈을 검사대에 대어보라고 했다. 양쪽 눈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처음에는 흐리게 설정되어 있는 화면이 동공의 움직임에 따라 해상도가 변하면서 선명하게 조정되는 것이 검사기의 작동 원리다. 첫 화면은 예전 기계와 같이 파란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하얀 돛단배였다.
“사실 이 돛단배 그림은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스타일이 올드하기도 하고, 고객층이 다변화되면서 취향에 따라 설정을 바꿀 수 있는 신기능이 탑재되어 있죠.”
그가 버튼을 눌렀는지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푸른 하늘 위를 가르며 날아가는 하얀색 경비행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나오기도 했고 물이 가득 찬 투명한 유리컵 안에 들어 있는 붉은색 하트로 바뀌기도 했다. 아직 안경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나 역시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기에 하트의 주변이 부옇게 흐려 보였다.
 

수연아, 지금까지 난 정작 중요한 걸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살아온 게 아니었을까. 거기 분명히 있는 마음이었는데도 깨닫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내내 흐릿했던 시야가 이제라도 명확해지기를 바라는 건 너무 늦은 바람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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