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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골목에는 희미한 비린내가 묻어 있었다. 전날 밤 술자리부터 실려온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호진의 발걸음은 힘찼다. 봄 햇살이 반짝 비치는 물웅덩이를 피해 전철역으로 향하는 그는 새로 녹음한 MD플레이어의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탔다. 아무런 의심없이, 오늘은 무언가 또 신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그저 신났다. 23세의 호진, 제대 후 복학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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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근길은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하는 프로젝트 미팅을 위해 퇴근 후 전철을 타고 가산으로 가야 하는 날이기에, 호진은 자전거를 놓고 20분 정도를 걷기로 했다. 어제 신문에서 오린 ‘입에 착착 붙는 일본어’를 손에 들었다. 오늘은 간단한 한자 단어에 문법도 단촐해 쉽게 외워진다. 하지만 눈에 잘 들어온다고 잘 암기되는 것은 아니다. 달궈진 후라이팬 위에서 금새 사라지는 물방울처럼, 기억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괜찮다. 다시 몇 번이고 외우면 되니까. 며칠 지나 머리 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더라도, 다시하면 된다. 이때가 하루 중 호진이 가장 집중력을 발휘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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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동작역 국철 승차장은 천장도 없는 지상 플랫폼이었다. 비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전철을 기다려야 했다. 호진은 그런 날도 좋았다. 여행을 떠나는듯한 기분이 들었고,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골랐다. 우산을 목에 기댄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방에서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끼우는게 불편했지만 상관 없었다. 학교까지 중간 옥수역에서 비슷한 시간에 늘 타는, 눈에 띄는 여학생을 만나는 날은 가슴이 설렜다. 전철이 움직일 때 오른편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강변대로에서는 차들이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 나갔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흔들리는 차량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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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도착해서 전자 담배를 세척하고, 탈모약과 몇가지 비타민을 캔틴에서 뽑아온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입으로 털어넣는다. 메일을 확인하고 나면 8시 30분 정도가 된다. 농구 선수가 자유투 전에 공을 몇 번 손에서 돌리는 것과 같은 이 루틴을 하고 나면 호진은 한 숨을 돌린다. 긴장이 풀린 것인지, 맥이 풀린 것인지 모호한 이 감정을 거친 후 찾아오는 무기력함. 오늘은 예상치 못한 귀찮은 일이 안 생기길 바라며 하루를 어떻게 덜 무의미하게 보낼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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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좀 뒤에 앉자”
“싫으면 넌 뒤로 가. 난 여기 앉을란다”
“모범생 났네. 군대 갔다오고 확 변했단 말야. 에이, 알았다”
호진은 강의실 교탁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색깔별 볼펜을 꺼내 수업 준비를 마친다. 군대 가기 전에 그저 인사만 하던 사이였던 Y는 제대 후엔 늘 붙어다니는 단짝이 되어줬다. 호진과는 달리 구김살 없이 여러 친구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던 그가 가까이 지내줘서 다행이었다. 수업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는 Y에게는 조별 프로젝트 자료 작성과 발표까지 도맡아 해주는 호진이 고마웠다. 상병으로 꺾이고 나서 개인 시간이 생긴 후, 휴가 때마다 10권이 넘는 책을 사와 탐독했던 호진이었다. 학교에서의 공부가 호진에게는 1년동안 키워온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았다. 결석할 이유는 커녕, 뒷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을 이유 따윈 없었다. 호진의 집중과 몰입은 결과로 이어졌다. 모두가 놀란, 1학기 수 장학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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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여기 짱박혀서 뭐하고 있냐?”
“상무님. 저 한 달 전에 발령받았잖아요. 우리 쇼핑몰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 중이죠. 하하”
“그랬나? 그럼 너 그 신사업은 이제 안해? 뭐야, 니가 시작했으면 책임져야지”
호진의 이동을 알면서도 능청스러운 K 상무는 돌려서 말한다. 작년에는 매주 늦은 시간까지 새로운 매장을 함께 준비해온 사이다. 연말에 오픈한 성과는 기대보다 낮았다. 예상치 못하게 경영진이 교체됐고, 새로 온 CEO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호진의 프로젝트는 서서히 메말라갔다. 몇 달전 흐지부지 공중분해된 담당 인원들은 서로 다른 부서로 흩어졌다. 그리고 호진은 그룹의 온라인 조직 통합으로 인해 다음 달이면 다른 계열사로 전출이 예정되어 있었다.
“곧 인사 드리러 한 번 찾아뵐게요. 저 어제 사직원 신청했습니다”
“아, 맞다. 너도 가는구나? 그래, 여기 있어봐야 뭐… 조직이 관심 쏟는 곳으로 가서 기회 찾는 것도 좋아”
“글쎄요, 나이 먹고 트렌드도 가물가물한 제가 뭐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허, 너 같은 일 잘하는 사람은 회사가 지켜야지, 그냥 뺏기면 안되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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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누리’ 일음 방에서 찾아지지 않는 일본노래는 가끔 ‘소리바다’ 검색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소리바다의 속도는 나우누리와 비교 안될만큼 느리지만, 밤새 걸어놓으면 다음 날 아침에 100%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약속이 없어 일찍 집에 오는 날, 호진은 이런 곳들에서 음악을 찾아 CD를 구웠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모닝구 무스메’, ‘우타다 히카루’의 신곡들은 알아서 사람들이 올려주지만, 이름도 모르는 아티스트의 곡을 호기심에 받았는데 자신의 취향과 딱 맞을 때의 기쁨은 컸다. 그렇게 한곡 한 곡 모아서 CD에 배치할 순서를 정하다보면 몇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오늘의 CD는 My J-pop Vol.3라고 네임펜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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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말다툼이 있었다. 며칠 전 아들 친구 엄마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한다. 19금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 아들이 푹 빠진 것 때문이었다. 호진이 먼저 발견했고, 아들과 몇 편 같이 보다보니 둘 다 팬이 되어 버렸다. 이젠 아들이 더 전문가가 됐다. 주말이면 같이 피규어를 구경하러 남부터미널과 용산을 쏘다니곤 한다. 호진에게는 아들과의 유대를 만들어준 고마운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내에게선 그간 쌓였던 핀잔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창 공부할 아이가 금요일이면 불금을 보낸다고 풀어지게 된 이유가 호진이라는 것이다. 회사원도 아닌 학생이 금요일에 놀 이유가 없는데, 호진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아들 밖에 없어? 왜 집에서 안좋은 영향을 줘”
호진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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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던 골목길 그 물웅덩이가 생각났다. 그 때의 발걸음과 시큼했던 냄새가 떠올랐다. 먹자골목 근처의 골목은 사실 지저분할 뿐이었을텐데, 빛나는 광경으로 남아있는 건 풍경이 아니라 자신이 빛났기 때문이리라. 무얼봐도 새로웠고, 어떤 것에도 감동했던 하루가 모여 호진의 23세를 다채롭게 만들었다. 그때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을 어떻게 채워나갈지만으로 설레던 시절이었다. 누구 때문에라도 재밌었다. 혼자 있어도 충만했다. 거기에 호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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