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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서는 뭘 먹으면 좋을까. 내비게이션 음성 안내가 도착 30분 전을 알리자 진욱은 지역 맛집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맞다. 추어탕 거리가 있었지. 산초를 뿌리고 두어 번 건더기를 휘저은 뒤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쭉한 국물을 한 수저 떠 입에 넣을 생각을 하니 배 한쪽이 기분 좋게 쓰라리며 허기가 올라왔다. 아침 겸 점심으로 배부터 채우고 일을 시작해도 시간은 충분할 터였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갓길에 차를 세운 후 목적지를 다시 입력했다.
11시를 조금 넘어 도착한 덕분인지 늘 만석이었던 식당에 빈자리가 몇 개 있었다. 진욱은 추어탕 특 짜리로 시키고 잠시 고민하다가 도리뱅뱅이도 하나 추가했다. 반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오후 내내 운전 일정이 있어서 참았다. 곱게 갈린 미꾸라지 살과 푹 익어 젓가락을 대면 바로 찢어질 정도로 연해진 우거지가 뚝배기에 가득했다. 공깃밥을 바로 넣어 몇 번 국물과 잘 섞고 나서 죽처럼 자작해진 추어탕을 밥공기에 덜어서는 후후 불어가면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뜨거운 추어탕을 삼키고는 반찬으로 나온 동치미 국물로 입안의 열기를 식히기를 반복하던 중에 도리뱅뱅이가 나왔다. 밥알이 적당히 섞인 건더기를 수저가 절반 찰 정도로 올리고 그 위에 양념된 미꾸라지를 두 마리 올린 다음 같이 먹었다. 이 집을 알려준 사람이 추천해 준 방법이었다.
속을 든든히 채우고 나니 야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진욱이 이번에 맡은 의뢰는 사극 드라마의 산중 전투 장면을 촬영할 배경으로 쓰일 곳을 찾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떠올린 장소가 여기였다. 오 년 전에 왔을 때 눈여겨 봐둔 곳이었다. 그때는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의 전투 장면용이었는데 다른 후보지가 선택되었다. 당장은 쓰이지 않는다 해도 데이터를 모아 놓으면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진욱은 이 일을 해 오며 알게 되었다.
필요한 사항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주변을 꼼꼼히 둘러봤다. 양측이 서로 활을 쏘는 초반 장면을 화면에 담기 위해서는 나무가 없는 열린 공간이 필요하다. 적당한 언덕이 있으니 오케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펼쳐지는 추격신을 촬영하기 위한 수풀림도 근처에 있었다. 다른 요건들도 모두 충족할 만한 곳이다. 예상했던 대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온 것일 뿐 데이터에 정리되어 있는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은 숙식을 해결할 곳을 찾는 일이다. 나흘 동안 연기자들과 촬영 스태프가 묵을 숙소, 식당을 포함해 김밥 같은 간식을 조달할 방법을 마련하고 예약 가능 여부까지 확인해야 한다. 지난번에 찾아 놓은 곳들이 아직 영업 중이기를 바라며 진욱은 산에서 내려왔다. 불안하다 싶더니 역시 절반 이상이 폐업해 버렸다. 조그만 규모의 상가 골목은 문을 닫은 지 한참인 듯한 매장이 절반은 넘었고 상권이 무너진 분위기가 역력했다. 분식집 주인은 코로나 난리 동안 여행객 발걸음도 끊기고 경기도 예전 같지 않아 버티지 못한 곳들이 태반이라며 자기는 임대료 없이 내 집에서 하니 그나마 문 닫지 않고 있다고 했다. 조금 멀리 중심부까지 나가 섭외를 마치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졌다. 위험하게 밤샘 운전해서 서울로 올라가는 것보다 하루 자는 게 낫겠다 싶어 진욱은 섭외 차 들렀던 모텔에 사전 점검 겸 방을 잡았다. 기왕 하루 묵는 김에 로케이션 제안서까지 끝내 놓을 생각으로 노트북을 켜서 촬영한 사진과 장소의 특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로케이션 매니저. 진욱은 이 일이 좋았다. 영화 오프닝 크레디트에 이름이 올라갈 만큼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다. 역시 코로나 여파를 이기지 못해 폐업한 영화사에서 일할 때에는 장소 헌팅만 담당하지는 않았다. 비용 정산, 홍보 마케팅 등 연출부 외의 일들을 두루 챙겨야 했지만 그중 가장 즐거운 건 단연코 현장 답사였다.
영화 일을 하고 있지만 시네마 키드는 아니었다. 그저 일로 대했을 뿐이다. 이쪽에 발을 들인 계기도 우연히 하게 된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였다. 일본어과 사무실로 통역 아르바이트 건이 들어왔다. 일본 현지 촬영 예정인 영화 로케이션 헌팅에 통역으로 가는 일이었는데 항공료 및 현지 숙박료가 제공되는 대신 급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4학년만 가능하다는 조건이 붙었으나 동기들은 취업 준비로 바빠서인지 지원자는 진욱 한 명뿐이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일행을 따라다니며 필요할 때 일본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말해주면 되었다. 후에 진욱의 팀장이 된 남자는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무료할 때면 그에게 방금 보고 온 장소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공항에 도착한 후 그는 진욱에게 “이쪽으로 소질이 있어 보인다”라고 했는데 몇 달 후 졸업식 즈음에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취업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10년 넘게 충무로의 중견 영화사에서 일해왔다.
회사가 없어진 후 반 년 정도는 놀았다. 부양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돌아다니는 일을 해 와서인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케이블 티브이를 틀어놓은 채 잠에 들거나 밤새워 새로 산 콘솔 게임을 하면서 말 그대로 푹 퍼져서 지냈다. 딱히 약속을 잡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고 거리 두기 정책 때문인지 보자는 일도 뜸했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진욱을 찾는 연락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극장 영화는 고사시켰지만 한쪽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부풀어 오르는 물 풍선처럼 OTT 영상 제작 쪽에 활황이 찾아왔다. 괜찮다 싶은 시나리오에 투자금이 몰리면서 드라마 제작 건에 파란불이 켜졌다. 덩달아 진욱의 일감도 늘었다. 혹한기를 버티며 제작사는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인 뒤였고 당장 필요한 일은 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에게 외주로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욱은 로케이션 매니저를 전문으로 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프로젝트 별로 정산을 받다 보니 수입은 직원으로 급여를 받던 때보다 높아졌지만 몸은 더 고되었다. 일이 몰릴 때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한 달 중 집에 머무는 날은 열흘 남짓이었다. 잠은 아무 데서나 자도 상관없었지만 몸이 축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먹는 것만큼은 제대로 챙기자는 게 진욱 나름의 원칙이었다. 때문에 현지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맛집을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전국의 맛집 지도가 진욱의 머릿속에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7시가 다 되었다. 어제 자료를 완성하고 메일로 전송한 후에 늦게 잠들었고 정오쯤에 일어나 남원에서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고속도로까지는 괜찮았지만 서울로 들어온 후 성북구 끝에 있는 집까지 오는 길의 정체가 심했다. 진욱은 샤워를 한 후 캔맥주를 따고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티브이를 켰다.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캔 하나를 몇 모금 만에 비운 후 하나를 더 가져올까 하다가 냉장고로 가기 귀찮다고 생각하며 나른함에 빠져 있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집에 찾아올 사람도 없고 택배가 올 일도 없었다. 알아서 가겠거니 하고 무시하려 했는데 잠시 후 다시 울렸다. 진욱이 짜증 섞인 짧은 한숨을 내뱉고 일어나 현관 문을 열자 자그마한 체구에 백발 머리를 묶어 뒤쪽으로 틀어올린 여자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랫집 할머니였다.
“1101호에서 왔어요.”
“네. 잘 지내셨어요.”
그녀는 이번에도 작은 쇼핑백을 들고 와서는 “이거, 대단한 건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며 진욱에게 건네려 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번에 주신 것도 아직 다 못 먹었는데요.”
진욱이 두 손을 들어 내저었지만 가만히 앞으로 내밀고 있는 쇼핑백은 어김없이 그의 손에 들렸다. 층간 소음으로 시끄럽다고 불만을 얘기하러 오는 사람이 왜 더 미안해하는 걸까. 게다가 선물까지 가지고 오는 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번에 받은 것은 약과 세트였는데,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가 아니라 하나씩 개별 포장된 것이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혹시 이번에도 시끄러워서 오신 거면, 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데요.”
“그게.. 죄송하지만 방금 전까지 뛰어다니는 듯한 소리가 천장에서 계속 나서요.”
말투는 조금 어눌했지만 옷차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느 노인과는 다르게 정중함으로 둘러싸인 사람이다. 군살 없이 깡마른 체구와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 사뭇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첫인상과 그녀의 몸가짐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묘한 이질감을 만들었다.
“그게 참 이상하네요.”
지난번에 같은 일로 그녀가 찾아왔을 때는 내일 떠날 출장 준비를 하느라 짐을 싸고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 소리가 울렸나 싶어 진욱은 바로 죄송하다고 했다. 엄마가 살던 아파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소음에 부주의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도 그냥 알겠다고 내려갈 낌새가 아니었다. 진욱은 답답한 마음에 바닥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잠깐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는 거실로 가서 무릎을 꿇고 한 쪽 귀를 바닥에 대어봤다. 그러자 희미하게 쿵쿵하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누가 뛰고 있을 때 나는 소리였다.
“정말이네요. 소음이 나네요. 이상하네. 어디지.”
진욱이 양쪽 눈썹을 찌푸린 채 생각하다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혹시, 같이 옆집에 한 번 가보실래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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