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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간은 안경점 문을 닫고 원룸에 돌아오면 이십여 년 전 사용하던 하드 디스크에 담긴 파일을 하나씩 열어 보며 시간을 보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설펐던 시나리오 습작이며 미장센을 배우겠다고 다운받아 놓은 영화를 다시 발견하는 건 땅 밑에 숨겨 놓은 타임캡슐을 꺼내보는 듯 아련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노트북에 연결해 그 시절의 음악을 틀어 놓고 흐릿한 해상도로 찍힌 사진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옛 기억이 거품처럼 가득 일어나 있는 욕조에 몸을 담근 듯 나른해진 채 밤이 깊어가는 지도 몰랐다.
 
저장된 파일을 얼추 다 살펴 본 다음에는 시스템 폴더로 옮겨갔다. 그중에 메신저 프로그램 이름이 있는 걸 클릭했더니 ‘Saved Chat’이라는 폴더가 보였다. 안에는 메신저 대화 상대 별로 각각의 폴더가 또 나왔고 연도와 날짜로 표기된 텍스트 파일이 들어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클릭해 봤다. 같이 영화 동아리를 하던 친구의 이름이었다. 예전에 촬영 장소를 확인하며 나눴던 채팅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메신저를 자주 사용하던 때 베타 프로그램의 테스터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작은 사은품을 내걸었나 그랬었다. 컴퓨터를 바꾸거나 포맷한 후에 메신저를 새로 깔아도 예전의 대화 내용이 모두 복원되도록 하드 디스크에 저장되는 서비스를 시험 운영하는 행사였다. 체험자로 선정되고 나서는 이런 기능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말 걸지 말아 주세요’나 ‘내 사랑과 200일’처럼 자기 근황을 대화명으로 바꿔놓은 사람들, 한때는 가까웠으나 이제는 인연이 끊어진 이들의 폴더를 지나 스크롤을 멈췄다. 수연이의 이름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저장된 시점인 파일 명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연출부에서 연차가 조금은 쌓였지만 여전히 난 바닥에서 구르며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연이가 나보다 먼저 졸업한 후에는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다. 그리고 메신저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카톡을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파일을 열어보니 수연이가 남긴 메시지 몇 줄이 있었고 내가 남긴 답은 보이지 않았다.
제일 아래에 있는 문장은 “정지후. 나 다음 달에 결혼한다. 청첩장 주고 꼭 오라고 하고 싶은데, 막상 얼굴 보기가 좀 그렇네. 잘 살아”였다.
그보다 일 년 정도 전에 남긴 글이 위에 보였다.
“어떻게 전화해도 받지를 않냐. 설마 내 번호 지운 건 아니겠지. 보면 연락해.”
 
짧은 두 메시지 위에는 그보다 긴 글이 있었다.
 
"
있잖아. 어제 저녁에 네 생각이 났어. 정확히는 네 냄새가 바람에 실려 있었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여름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였어. 이맘때의 바람은 가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 이번은 너였지. 너의 등에 딱 붙은 채 네 허리를 꼭 안고 달리던 때 맡았던 냄새. 그리고 네 파란 바이크.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을 때였지. 무엇이든 하려면 다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그게 그렇게 되니. 시간은 손에서 흘러내릴 듯 많으리라 생각할 때였잖아. 매미 소리에 눈이 떠지면 그저 천장만 바라보며 한동안 누워있던 여름 방학이었어. 스마트폰 같은 건 없었으니 왜 이걸 보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손가락을 놀릴 일도 없었고. 오늘은 무얼 할까, 누굴 만날까,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창밖에서 귀여운 소리가 났지. 작은 공룡이 우는 것 같이 앙증맞게 그르렁 거리는 소리에 밖을 보니 네가 손을 흔들고 있더라.
맨날 영화만 보던 네게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야, 타”라고 수줍은 듯 외치던 널 보고 웃느라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어. “나 지금 츄리닝인데”라는 내 말에도 넌 막무가내였지. 그냥 한 바퀴 돌아보자는 네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네 뒤에 앉아버렸어.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구한 그 바이크를 너는 ‘파란 차’라 부른다고 했지. 스쿠터가 무슨 차냐는 내 핀잔에도 넌 그저 웃기만 했어.
 
이걸 산 이유는 백 가지도 넘지만 넌 그중 몇 개만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서. 무작정 생각날 때 바다를 가보고 싶어서. 그리고 지금 이렇게 해보는 거였다고 했지.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 그 말을 하는 네 가슴이 뛰고 있음을 네 등에 뺨을 대고 있던 난 알 수 있었어.
 
여름 바람은 가끔 이렇게 날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애써 지운 기억이 바람에 섞여 내 온몸에 부딪혀 오면 피할 길이 없어. 너의 파란 차를 타고 넌 어디까지 다녀 봤을까. 네가 하고 싶었던 백 가지 바람은 다 이루고 살고 있니. 이제부터 난 바뀔 거라고 말하던 네가 참 멋졌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예쁘지 않냐고 물어봤던 그 파란 바이크보다 정지후 네가 몇 배는 더 근사했다고.

 
대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어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보고 꽂혀서는 중고로 스쿠터를 샀다가 몇 달 못 타고 걱정 섞인 엄마의 잔소리에 팔아버렸다. 바이크 가게에서 처음 가져온 다음 날 수연이를 태우고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메신저로 전해 준 노래를 MP3 플레이어에 넣고 늘 듣던 녀석에게 틈만 나면 “이젠 안 외롭지?”라며 장난처럼 묻곤 했었다. 평소였으면 주먹을 쥐고는 내 팔뚝을 세게 쳤을 텐데 수연이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이제야 내게 당도한 수연이의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고는 모니터에 띄어진 모든 창을 닫고 하드 디스크를 연결 해제했다. 스탠드 하나만 밝혀진 적막한 방에서 워드 프로그램을 열고는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수연이에게 카톡으로 파일 하나를 전송했다. 방금 완성한 시나리오였다. 50개 정도의 신으로 구성된 중편 분량이었고 영화로 만든다면 러닝 타임은 한 시간이 채 안 될 터였다. 등장인물도 남자 하나 여자 하나였다. 미리 구상한 플롯 없이 그날 밤부터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만들어 낸 이야기였다. 한 번도 생각이 막힌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야기였으니까. 수연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였으니까. 아무런 말 없이 파일만 보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지후, 안경 썼네. 똑똑해 보이고 싶어진 거야?”
수연이 날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만난 녀석은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늘 입고 다니던 펑퍼짐한 바지 대신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갈색 체크무늬 스커트에 검은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따듯해 보이는 질감의 녹색 코트 안으로 하얀 터틀넥 스웨터가 동그란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지금까지 본 그 어느 때보다 여성스러웠다.
“얼마 전에 시력 검사기를 새로 들여놨거든. 시험 삼아 검사해 보니까 눈이 꽤 나빠졌더라고. 안경점 주인이 안경 안 쓰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럼 이제 잘 보이겠네.”
“응. 제대로 못 봤던 걸 이제야 알아볼 수 있게 됐어.”
“근데 별일이야. 정지후가 먼저 보자고 연락하고.”
“네가 좋다고 했던 시나리오에 나왔던 데. 같이 가보고 싶어서.”
피이, 하듯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수연의 얼굴에 희미하게 홍조가 피어났다. 곧 우리가 같이 다녔던 대학교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서인지 학교 근처에 도착할 즈음 버스 안은 한산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무선 이어폰 한 쪽을 수연에게 건네고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재생 목록은 그 해 여름에 전해줬던 앨범과 똑같이 설정해 두었다. 첫 곡으로 아소토 유니온의 THINK ABOUT’ CHU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많은 날을 혼자 있었지 Baby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던 날들
나를 향한 네 미소를 느꼈을 때
내 마음은 이미 타오르는 한여름

 
그 여름밤의 매미 소리가 어디선가 음악에 실려 들려오는 듯했다. 두 시간 오 분보다 몇만 곱절의 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노래에 담았던 내 마음이 제대로 전송되는 중이었다.
수연이 창밖을 바라보며 들릴 듯 말 듯 “외롭지 않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멜로디에 맞춰 작게 흥얼거렸다. 노래의 드럼 비트에 맞춰 창문 위로 그녀의 입김이 흐릿하게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리듬을 타고 무릎 위에서 살며시 움직이고 있는 손을 잡고 싶었다. 아니, 곡이 끝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자. 어깨로 맞닿아 전해오는 지금의 이 온기만으로 충분하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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