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옛날에 지은 아파트는 콘크리트가 두꺼워서 층간 소음이 덜하다던데 여기는 아닌가. 진욱이 살고 있는 고풍스러운 이름의 ‘궁전 아파트’는 지은 지 30년 정도 되었다. 12층짜리 3개 동으로 구성된 아담한 규모의 단지다. 최근에 도색을 새로 한 듯 아파트 외관은 깨끗했고 엘리베이터도 깔끔한 신형이었다. 지하철역과 멀지 않고 길 맞은편에 대형 마트가 있어 근방에서 집값은 괜찮은 편이었다. 진욱의 집은 2 1201호로 제일 높은 층에 있다. 한 개 층에 두 집이 있어 동마다 24 가구가 살고 있지만 진욱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집에 자주 있는 편도 아니라 인사하고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다른 주민들도 서로 데면데면할 뿐 대도시의 여느 이웃들처럼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할머니에게 옆집에 가보자고는 했지만 진욱은 정작 거기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있었다. 분명 몇 번은 마주쳤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호기롭게 말한 게 조금은 후회되기 시작했다. 괜한 일에 끼어든 게 아닐까. 그가 주저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먼저 움직였다. 나이에 비해 경쾌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1202호 앞까지 간 그녀는 뒤따른 진욱이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현관문 스피커를 통해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린아이가 내는 듯한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집에서 왔는데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진욱은 만약 잘 못 짚은 거면 손에 들고 있는 거라도 주고 상황을 무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고 이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라는 그녀의 말과 함께 집 안에서 쿵쿵하고 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진욱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층에서 오셨는데요.” 진욱이 옆에 서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을 꺼내자 그녀가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천장에서 계속 소음이 들려서 실례를 무릎 쓰고 이렇게 찾아왔네요.

진욱도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이거, 변변치 않지만 드세요”라고 말하며 쇼핑백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소음을 내는 쪽에 주려고 준비한 것일 테니 누가 받든 상관없겠지 싶었다. 여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죄송하다, 조심하겠다고 말하고는 진욱이 건넨 걸 받았다. 그때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얼굴이 땀 범벅이 된 채 현관문 쪽으로 조르르 달려왔다. “누나,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눈동자에는 어른 셋이 모여 있는 어색한 상황이 재미있는 일처럼 보이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곧이어 거구의 남자가 양손에 비닐봉지를 든 채 내려서 걸어오다가 어른 셋과 아이 하나가 모여 있는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란 듯 멈칫했다. 곧이어 발걸음을 재촉한 그에게 아이가 “아빠”라면서 맨발로 달려가 굵직한 한쪽 다리에 매달렸다. 그는 190 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키에 살집도 있어 복도를 꽉 채울 듯한 체구였다. 군인처럼 짧게 자른 머리였으나 하얀 피부에 수염이 거의 없는 동글동글한 얼굴은 몸집과 어울리지 않게 순한 인상이었다.

“저… 무슨 일이시죠?

조금은 떨리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몸집보다 인상에 어울리듯 얇고 앳되게 들렸다. 그 엇박자에 진욱은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려 했다. 여자가 “오셨어요”라며 고개를 짧게 끄덕여 인사한 후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줬고 층간 소음 때문이란 걸 알아챈 그가 연신 죄송하다며 진욱과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돌아가겠다는 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괜찮다는 만류에도 손가락의 굳은살이 느껴지는 두툼한 두 손으로 쥐여준 것은 과일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였다. 할머니에게는 딸기, 진욱은 귤이었다. 진욱이 집에 돌아와서 보니 귤은 건너편 마트에서 파는 것이었고 상자에는 30% 할인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그걸 바라보던 진욱은 이게 대체 무슨 난리였나 싶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른한 기운에 찾아오던 잠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경아는 퇴근한 형욱이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걸 정리하는 동안 동안 주호가 오늘 유치원에 다녀와 간식하고 저녁으로 뭘 먹었고, 내일 유치원에 챙겨갈 게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주고는 코트를 입었다. 방금 일로 그에게 한 소리 들을까 싶었는데 오늘도 수고 많았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아직 벗지 않은 점퍼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 경아에게 건넸다. 오후 동안 주호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교대를 할 때마다 아이 아빠는 늘 이렇게 마실 것 하나씩을 챙겨주었는데 그게 고마우면서도 좀 청승맞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취업 되어서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할 텐데.

 

‘순경 민경아’의 꿈은 경찰 공무원 시험에서 세 번째 떨어진 후 접었다. 계속 떨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커트라인과 점수 차이가 좁혀지기는 해야지, 칠 때마다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다. 공부에 취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체대 가라는 말을 들을 걸 그랬나. 경찰 쪽을 생각한 것도 몸을 쓰는 직업 중 그나마 안정적이기 때문이었다. 필기는 턱 없이 부족했지만 몸을 풀기 위해 혼자 해 본 체력장 점수는 합격 기준을 월등히 넘기고도 남았다.

대학 졸업 후 이미 이 년. 이제 일반 기업 공채는 이력서를 아무리 넣어봐야 서류 통과도 되지 않았다. 경아는 우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중소기업청 같은 국가 기관에서 운영하는 취업 연계 강의 과정을 신청했다. 지금 출석하고 있는 건 온라인 커머스 프로그램인데, 두 달 뒤 수업이 끝나면 우수 수료자에게 후원 기업의 면접 기회가 주어진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낮 시간 동안 매일 출석해야 하기 때문에 전에 하던 주간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없었다. 다른 일을 찾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돌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3시 정도에 유치원이 끝나는 아이를 데려와 봐주다가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부모가 퇴근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경아는 오늘 계속 몸이 찌뿌둥하고 수업 중에도 집중이 잘 안되었다. 주호에게 저녁을 챙겨준 후 졸려 하길래 소파에 뉘여 잠을 재우고 난 뒤 거실에서 몸을 풀 겸 가벼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역시 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체질인가. 잠깐 한다는 게 본격적인 PT 체조까지 이어졌다.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자 몸이 개운해지면서 기분도 상쾌해졌다.

어느 틈에 잠에서 깬 주호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경아의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옆으로 와서 따라 하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아이가 서툰 몸짓으로 흉내 내는 게 귀여워 경아는 과장된 기합 소리를 섞어가며 주호에게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가 신이 난 주호가 쿵쾅대며 거실에서 뛰면서 체조를 하는 걸 내버려 뒀고 조금 지나 그 소리에 옆집과 아랫집에서 동시에 시끄럽다고 찾아와 버렸다. 게다가 그걸 아이 아빠한테 걸리다니. 남의 집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었던가 싶어 경아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디 작은 데라도 합격해서 남들처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살고 싶다.

땀이 식으면서 점퍼 사이로 파고드는 겨울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아빠, 나 이거 하나 더 먹어도 돼?

옆집 남자가 준 쇼핑 백에 들어있던 한과 세트가 맛있는지 주호가 하나 더 뜯으려 하다가 형욱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 전에 간식은 안 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 모양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아이인데 먹을 것에 대해서만은 재잘대며 말문이 트인다. 세 살 때에는 하도 말이 없어 문제가 있나 싶어 병원에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돌이 갓 지난 아이와 남편을 버리고 집을 떠난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호는 한창 까불 나이인데도 늘 남의 눈치를 살피는 성격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어봐도 대답을 잘 하지 않았고, 뭘 갖고 싶다는 말도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먹을 것이었다. 작은 손으로 한과 봉지를 든 채 조물 거리고 있는 아들을 젖은 눈으로 바라던 형욱은 “아까 운동 열심히 했으니 맘껏 먹어도 된다”라며 주호의 머리를 오래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난 남자와 살겠다고 이혼을 요구한 아내와 헤어진 후에 같이 살던 집에서 나왔다. 여기 궁전 아파트로 이사 온 건 형욱의 직장하고 가깝기 때문이었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드림 마트가 그의 일터였다. ‘늘 저렴하게 드립니다, 드림마트’라고 매장에서 외치며 십 년 넘게 일하다 보니 부점장이라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재혼 생각을 한 적 없었고 마땅한 상대도 없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주호를 키워내야 했기에 가까운 집을 찾다가 전세를 얻은 게 이곳이었다. 아들이 젖먹이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까지는 입주 도우미를 쓰는 데에만 월급의 절반이 나갔지만 바다가 보이는 먼 고장 출신인 형욱은 어디 부탁할 곳이 없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는 하원 후 네다섯 시간만 맡기면 되고 저녁에는 되도록 형욱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 했다. 부모가 가야 하는 유치원 행사나 급히 병원에 데리고 갈 일이 있을 때는 형욱의 사정을 아는 직장 동료들이 편의를 봐 주었기에 어찌어찌 지금껏 주호를 키워올 수 있었다.

 

너무 어린 사람을 도우미로 데려온 건 아닌가. 형욱은 아까 일을 되새기며 생각했다. 전에 주호를 봐주던 아주머니가 좋았는데. 살갑지는 않았지만 할 일만 조용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해주던 사람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후 그릇도 모양과 크기 별로 군대의 사열처럼 정리해 놓곤 했다. 어떨 때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정확하게 계산된 행동이 매정하게 느껴졌지만 어린 주호를 맡겨 놓기에는 안심이 되었다.

그분이 갑작스레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나오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막막함뿐이었다. 주호가 초등학교 입학까지 이 년. 혼자 놔두기는 아직 어린 나이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급했기에 인력 업체에서 가장 먼저 추천해 준 사람을 무작정 선택했다. 미혼의 젊은 여성이었지만 가려서 사람을 고를 상황이 아니었다.

민경아라는 이름에서 예상했던 연약한 인상이 아니었다. 통통하다고 하기보단 통뼈라는 표현이 더 맞는 외모였다. 처음 봤을 때 형욱이 ‘우리 매장에서 일하면 잘 하겠다’싶은 생각이 들 만큼 다부져 보이는 여자였다. 꼿꼿이 서 있는 자세와 호쾌한 몸놀림에서 운동을 꽤 한 듯해 보였고 남자아이와 잘 어울려 주겠다 싶었다. 다만 그녀가 내건 한 가지 조건이 걸렸는데, 단기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삼 개월 정도 후에는 그만 둘 예정이고 그때 또 다른 사람을 구해야 했다. 오늘 일을 생각해 보니 형욱은 차라리 그게 낫겠다 생각했다.

 

(계속)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