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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 하는 현자의 팔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문 앞까지만 부축하려 했던 진욱은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실례지만, 같이 모시고 들어갈게요”라고 말했다. 현자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1101호는 진욱의 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두 배는 넓어 보일 정도였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거실은 휑했다. 티브이도, 소파도 보이지 않았고 현관 맞은편 벽 앞에 일인용 안락의자와 작은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책이 서너 권 있는 것으로 보아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소파가 있으면 그 위에 그녀를 누일 생각이었던 진욱은 난감한 표정으로 부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싱크대 맞은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커다란 원형 식탁이었다. 식탁 둘레에 놓인 의자도 6개나 되었다. 식탁만큼은 여느 대가족 못지않은 크기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실 풍경과 기묘하게 대조되었다.

안락의자에 현자를 앉혔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일본어로 엄마를 찾고 있었다. 진욱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 봤다. 허락 없이 남의 살림살이를 뒤지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일본 사람들은 차를 마시면 마음이 안정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녹차 티백이 바로 보였고 가스레인지 옆에는 전기 주전자가 있었다. 수돗물을 받아 스위치를 올리자 고요한 가운데 거세게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현자는 진욱이 건넨 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모락모락 얼굴에 닿는 차향과 손바닥에 전해오는 온기가 한기에 몸서리칠 정도로 떨리던 몸을 조금씩 데워주었다. 두어 모금 정도 뜨거운 차를 목으로 넘기고 나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정면에 서서 자기를 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윗집에 사는 총각이 왜 여기 있는 건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는 양쪽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현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그가 건넨 말에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이 기억났다. 어둠에 휩싸이고 나서 들이닥친 공포와, 어두운 밤에 깼을 때 엄마 아빠 없이 혼자라는 무서움에 몸을 떨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몸에 힘이 빠진 것까지. 하지만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여전히 백지처럼 새하얬다. 그가 여기로 데려왔고, 차까지 끓여준 모양이었다. 현자는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진욱을 쳐다봤고 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올라왔다.

 

아래층 남자는 마주치는 시간이 대중없는 걸 봐서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일을 하지 않는 듯했다. 오늘도 어디 먼 길을 다녀온 것처럼 묵직해 보이는 백팩을 등에 메고 있었다. 늘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데 직업이 뭘까.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격, 가르마를 타서 정리된 머리와 검은색 뿔테안경이 얌전한 인상이었다. 진욱은 단정하게 보이려 애를 쓰는 편이었다. 자유롭게 입고 다녀도 되는 이쪽 일을 할수록 오히려 대기업 직장인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 차별화라고 할까,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혹시 아까 내가 일본어로 말했나요?”

그러셨어요. 어머니를 찾으셨어요.

진욱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구나. 정말로 오랫동안 잊었던 그 생각이 났던 거구나. 그림책 페이지가 넘어가듯 현자는 아까 장면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는 중에 헛말이 나왔네요.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았거든요.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쪽 억양이 거의 없으시네요.

“그쪽도 일본어를 잘 하던데요. 혹시 나처럼 교포인가요?

“아닙니다. 대학 때 배운 게 있어서 더듬더듬 흉내 내는 정도인걸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이렇게 세워놓고 있었네.

현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기운을 완전히 차린 그녀는 부엌으로 잰걸음으로 가서는 손짓으로 진욱을 부른 뒤에 차를 끓이고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다. 괜찮다며, 이만 쉬시라는 진욱의 말에도 그녀는 생명의 은인인데 그럴 수 없다며 조금만 있다 가라며 웃었다.

엄마를 불렀던 이유를 말하면서 현자는 살아온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았다. 처음에는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진욱도 조곤조곤 이어가는 그녀의 말에 차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드라마 같은 현자의 이야기에 어느 틈에 푹 빠져든 그는 집에 갈 생각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백팩은 식탁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차가 식은 지 오래였지만 둘 사이의 조곤조곤한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거실 창으로 들어와 부엌까지 길게 드리워진 노을이 두 사람을 따스한 빛으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경미와 통화를 마친 후 형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싫은 티를 낼 것까지 있나. 그렇다고 밤새 주호를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야근 정도가 아니라 집에 못 갈 상황이었다. 오후 3시 조금 지나 본사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한 달 전에 새로 부임한 본사 대표님이 내일 형욱이 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점포에 방문할 예정이고, 잘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높으신 분이 오면 매장에는 한차례 태풍이 몰아닥친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던 곳까지 대청소는 물론이고, 상품 재고를 쌓아놓는 후방 창고도 다시 뒤집어 놓는 수준으로 정리를 해 놓아야 한다. 본사 지침을 무시하고 자율적으로 하던 상품 진열도 규정 대로 바꾸는 것이 좋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은 것도 무시 못 할 정도의 일이긴 하지만.

 

때문에 못해도 일주일 전에는 예고가 오는 게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이런 전시 행정이 현장에 부담을 준다며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그런 배려가 실은 더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걸 높으신 분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모자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준비는 하게 된다. 오늘 같은 경우가 그랬다. 영업담당 임원이 방금 와서는 한바탕하고 돌아갔다. 시설 점검부터 환경 미화까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조치를 끝내 놓으라고 한 게 한가득이었다. 대표님은 오후 방문 예정이나 오전 10시 개점에 맞춰 본인이 사전 점검 차 먼저 올 테니 하나라도 미비한 점이 발견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떠났다. 그 임원보다 몇 살 위인 점장은 내내 아랫입술을 깨문 채 한 마디도 안 하다가 그가 떠난 후 형욱을 보고 말했다. “어쩌겠냐. 해야지. 하루만 고생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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