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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있으니, 이제 아가씨도 이웃이네요.

현자가 희미하게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말했다. 경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웃이요? 여기 살지도 않는데 무슨 이웃이에요. 저는요, 일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니, 일도 아니지. 그냥 알바생이예요. 돈 받고 아이 봐주는 사람일 뿐인걸요. 그것도 세 달짜리 단기 알바.

경미의 가시 돋친 말투에 진욱은 현자 옆자리에 앉아 큼지막한 족발 뼈를 야무지게 뜯어먹고 있는 주호를 바라봤다. 아이는 뼈 사이의 살을 발라 내는데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랬군요. 전 이모나 고모인 줄 알았는데.

현자가 민망한 얼굴로 사과하듯 말했다. 그때 주호가 뼈에서 입을 떼고는 말했다.

“난 이모나 고모 없어. 할머니도 없고 엄마도 없어. 아빠만 있어. 그래서 아기 때부터 일하러 오는 아줌마랑 계속 같이 있었어. 지금은 누나가 있어. 그런데 누나 가고 나면 다음은 누가 올지 아직 몰라.

“아이고. 그랬구나. 그럼 이 할미가 아가 할머니가 되어 줄까나.

현자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주호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자 “응. 그럼 나 자주 놀러 와도 돼?”라고 물었다.

“그럼. 과자 많이 사 놓고 있어야겠네”라며 웃고 나서 현자가 경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아가씨도 언제까지 일하는지 몰라도 이렇게 볼 수 있을 때 자주 봐요. 이것도 다 인연이잖아요”

그러고는 그녀의 빈 잔에 술을 채워줬다. 경미는 그 말이 괜스레 고마워 코끝이 찡해졌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매장 정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밤을 꼬박 새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끝난 셈이었다. 함께 야근한 직원들이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걸 챙긴 형욱은 그제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중간에 경미에게 전화하는 것도 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11시가 조금 넘어 경미가 보낸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1101호에서 주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으니 퇴근하면 여기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남의 집에서 있었다니. 지난번처럼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사이에 돌아왔나 싶어 집에 가봤으나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형욱은 1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너무 늦어 실례라는 생각보다 주호에게 별일 없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쉰 후 초인종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이라고 그가 입을 열려 할 때 현자가 쉿, 하는 시늉으로 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희미하게 비치는 거실 등 불빛 아래 주호가 경미의 한쪽 어깨에 안겨 자고 있었고 두 사람 위에는 포근해 보이는 이불이 덮여 있었다.

 

늘 지나던 풍경에서 의외의 변화를 발견할 때 계절이 바뀌는 걸 알아채게 된다. 진욱은 궁전 아파트 길 건너 드림마트로 가던 길에 새봄이 건네는 첫인사를 만났다.

 

몰아닥치던 일거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업계에서는 잠시 쉬어가는 분위기라는 의견과 함께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며 묻지마 투자가 끝나고 이제 다시 영화나 드라마 제작 시장에 빙하기가 올 거라는 비관 섞인 전망도 있었다. 어쨌든 진욱은 이 년 넘게 해온 강행군에 지친 김에 푹 쉬자는 생각이었다. 이사 온 지 한참이 되었지만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동네 여기저기를 거닐고 현자와 조용한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조용한 일상이 최고의 휴식이 되었다.

 

드림마트 바로 앞에 있는 횡단보도가 공사 중이고 오늘 하루는 왼쪽으로 백 미터 정도에 있는 육교를 이용해 달라고 현수막에 안내되어 있었다. 바람에는 아직 겨울의 매서움이 담겨 있었지만 햇살은 아늑했다. 진욱이 얕은 숨을 내뱉으며 계단을 올라 길 반대편으로 건너갈 때 육교 한편에 콘크리트 틈 사이로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동그랗고 하얀 꽃송이 몇 개가 피어 있었다.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지 곳곳에 틈이 벌어져 있었고 푸른색의 풀들이 그 위로 빼꼼히 고개를 들고는 산들산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봄이 작은 손으로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꽃은 이런 데서도 피는구나.

진욱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일 사람들이 저기 한데 피어 있는 꽃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요. 선생님이 부탁하신 거.”

형욱이 매장에 들어온 진욱을 보고는 반가운 얼굴로 그를 정육 코너로 데려가 미리 준비해 놓은 고깃덩어리를 건넸다. 이제는 모두가 현자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예외는 주호였다. 녀석은 선생님은 무서울 때도 있어서 싫다면서 우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할머니 할래,라고 소리쳤고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한우 불고기 거리로 제일 연하고 육질 좋은 걸로 세 근 챙겨 놓았어요.”

그런데 주호 아버님은 뭐 준비하실 거예요?”

진욱이 묻자 형욱은 두툼하고 큰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제가 음식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이따 퇴근길에 족발하고 보쌈이나 넉넉하게 사 가려고 해요.”

주호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럼 전 국물 될만한 걸 좀 해야겠네요.”

진욱은 형욱에게 저녁에 뵙겠다는 인사를 건넨 후 카트를 끌며 매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맵지 않게 생대구를 지리로 끓여 볼까. 마침 물이 좋아 보이는 국내산 대구 한 마리가 보여 메뉴를 결정했다. 이제 무하고 미나리를 사야겠구나. 채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오늘은 세 집의 식구가 저녁에 모여 경미의 취업을 축하하기로 한 날이었다. 경미는 바랬던 대로 청년 취업 지원 교육 프로그램을 마치고 지원한 회사에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다.

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각자 음식을 해서 가정식 백반한 상을 차려 보자고 그녀가 제안했다. 백반이 되려면 된장찌개, 제육볶음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냐고 진욱이 물었을 때 현자는 웃으며 아무거나 괜찮다고, 집에서 모여 같이 먹으면 그게 가정식 백반이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현자는 고기 감자조림을 만들 생각이었다. 일본에서 살 때 이모가 해주었던 음식이었다. “네 엄마가 여기 들어있는 감자를 참 좋아했다라는 말 때문인지 아끼꼬였던 어린 현자는 달짝지근하게 양념이 밴 포슬포슬한 감자가 고기보다 좋았다.

오늘 함께 먹고 나서는 모두에게 나누어 주려고 큰 냄비에 가득 찰 양을 만들 생각이었다. 진욱이 소고기를 가지고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현자는 한창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의 한쪽 손에 들린 묵직한 장바구니를 보고는 뭘 만들 생각이냐 물었지만 그는 등 뒤로 숨기며 비밀입니다하고 웃기만 했다.

 

형욱이 족발과 보쌈을 들고 현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경미와 주호는 나무토막을 하나씩 빼는 보드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휑하던 1101호 거실에는 아이를 키우는 집처럼 곳곳에 장난감이며 동화책이 흐트러져 있고 햇살이 비치는 창문 앞에는 어린이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경미가 주호를 봐주는 게 오늘로 마지막이었지만 새로운 사람은 구하지 않았다. 현자가 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달 전부터 경미는 현자의 집에서 주호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괜히 번거롭게 해드리면 안 된다는 형욱의 말에도 주호는 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고, 현자 또한 적막하던 집이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아서 좋다라며 본인이 먼저 주호를 불렀다.

현자가 경미를 대신해 오후 시간에 주호를 봐줄 테니 새사람 구하지 말라고 했을 때 형욱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그가 조심스레 사례는 어느 정도면 괜찮으시겠냐 묻자 이 한 몸 건사할 정도 재산은 있으니 걱정 마시고, 가끔 올 때 신선한 과일이나 가져다주면 된다라고 현자는 미소 지었다.

 

진욱이 장갑을 낀 양손으로 냄비를 들고 허리를 뒤로 뺀 째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뚜껑을 열어 맑은 국물과 살이 오른 대구를 한 토막 씩 건져 다섯 개의 그릇에 담아냈다. 고기 감자조림의 소고기를 포크로 건져 입에 넣고 있는 주호 옆에서 현자가 하얀 대구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줬다.

“시원하고 좋네요. 지리 국물 내기 어렵지 않아요?”

현자가 국물을 한 수저 뜨고는 진욱을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바라봤다.

지리는 생선 물만 좋으면 돼요. 채소하고 소금이 간을 해 주거든요.”

진욱이 경미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말했다. 요리 대신 술을 책임지겠다며 경미는 현자가 마시기 편하게 사케를 큰 병으로 사 왔다.

 

형욱은 고기 감자조림 양념에 밥을 비벼서는 숟가락으로 양껏 퍼서 입으로 넣고 있었고 현자는 지리 국물에 연하게 익은 짙푸른 미나리를 입으로 오물거리며 씹었다. 진욱은 보쌈김치로 수육 고기를 말아서는 그 위에 마늘을 얹고 있었다.

둥그렇고 큰 식탁에 마주하고 앉은 이들 누구도 말없이 조용하게 먹는 것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경미는 이 사람들과 다시 이렇게 밥을 먹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면서도 우스웠다.

피식피식 웃는 모습에 주호가 누나, 뭐가 재미있어?” 하고 물었다.

웃었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모를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한 손으로 훔치며 경미가 말했다.

다음에 뭐 만들어 올지 생각해 보다가, 좋아서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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