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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나서 경미는 쾌재를 불렀다. 두 주먹을 쥔 채 헛, 하고 짧게 기합 소리를 내자 주호가 “누나 뭐해?”라고 물었다. 딱히 다른 일은 없었지만 밤늦게까지 아이를 봐주기 어려운 듯 연기했더니 형욱이 먼저 추가 수당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도 하루치 일당의 두 배나 되는 금액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늘 아빠는 늦으실 거고 누나가 같이 있을 거라고 하니 주호는 서운한 표정과 좋아하는 얼굴을 번갈아 내비쳤다. 얼른 오늘 할 거 마치고 놀자는 말에 주호가 거실 바닥에 엎드려 수학 학습지를 풀었다. 경미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그 모습을 보다가 어느 틈에 졸기 시작했다.
눈을 뜨니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어느 틈에 주호가 소파로 올라와 경미 옆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살며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봤지만 두 명 분 밥상을 차리기에는 뭔가 애매했다. 퇴근하며 할인 상품으로 장을 봐오던 주호 아빠가 요즘은 바빴는지 채워놓은 것이 별로 없었다. 경미가 부엌에서 내는 소리에 주호가 눈을 뜨고는 “누나. 배고파”라며 조르르 달려왔다. 경미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주호야, 우리 짜장면 시켜 먹을까?”라고 했고 아이가 폴짝대며 뛰기 시작했다. 또 아래층에서 올라올까 싶어 경미는 화들짝 놀라 준호를 안아 소파 위에 앉히고는 배달 앱을 켜서 짜장면과 짬뽕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탕수육을 추가했다가 다시 군만두로 바꿨다. 저녁 식사로 내는 돈도 아저씨한테 청구할 건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주호가 배고프다며 보채기 시작했고 배달 앱 화면에는 배달 완료라는 알림이 떴는데도 문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배달비도 많이 올랐는데 뭐 하자는 거야. 다시 집에 들어와 짜증이 올라오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왔나 보다!라고 둘이 외치며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옆집 남자였다. 진욱이 플라스틱 용기가 담겨 있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배달 시키셨어요? 방금 집에 왔는데 앞에 이게 있더라고요.”
동그란 반투명 용기 안으로 보이는 검은색으로 보아 짜장면이 틀림없었다. 경미는 그제야 배달원이 호수를 헷갈려서 옆집에 놓고 갔구나,라고 생각했다. 진욱이 “맞네요. 여기 1202호라고 되어 있네요”라고 봉지 옆에 붙어 있는 영수증을 보며 말했다. 경미가 건성으로 들으며 봉지를 얼른 받으려 할 때 그의 옆에 서 있는 아랫집 할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아저씨는 아직 안 오셨냐고, 둘이 식사하는 거냐고 물어왔다.
“네, 오늘 늦으신다네요”
경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현자가 말했다.
“같이 저녁 할까요? 우리도 이제 식사하려고 하는데. 족발 사서 막 돌아온 길이거든요.”
현자의 손에는 꽤 묵직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경미가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던 중에 주호가 조르르 현자 쪽으로 다가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와! 족발! 맛있겠다.”
현자 집의 유일한 가구인 커다란 식탁에 네 명이 동그랗게 둘러 앉았다. 경미가 시킨 짜장면과 짬뽕은 식어 있어 레인지에 다시 돌렸다. 거기에 족발과 막국수, 보쌈김치까지 올려놓자 제법 풍성한 한 상이 마련되었고 현자가 냉장고에서 장아찌며 쇠고기 장조림 같은 반찬들도 꺼내 왔다.
경미는 이 할머니가 달리 보였다. 층간 소음 때문에 찾아온 날에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신경질적인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뭐 부족한 건 없는지 살펴 가며 모여 있는 그들을 세심히 챙기고 있었다. 어찌 됐건 먹을 건 더 많아졌고, 주호가 그녀 옆에 딱 붙어 있어 마음껏 먹기 편했다. 나쁠 건 하나도 없네. 경미가 느슨하게 긴장을 풀고 있을 때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던 진욱이 하얗고 주둥이가 길쭉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반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번 출장 때 사온 지역 토산주인데요. 향이 좋다고 해서. 같이 드시죠”
그의 말에 경미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입안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분은 친척이나 뭐 그런 사이인가요? 그냥 이웃이라기엔 많이 가까워 보이는데.”
툭 내던진 경미의 말에 진욱의 얼굴이 빨개졌다. 술 몇 잔이 들어가니 경미는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체구 때문에 술이 세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그리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술자리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마시는 것보다 안주를 먹는 게 좋기도 했고, 술기운에 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좋았다. 난 맨날 긴장하며 살아왔으니까 가끔 이래도 괜찮아. 경미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득했다.
“저랑 선생님이요? 가족은 아니고요. 뭐라고 해야 할까.”
진욱은 언제부턴가 할머니라는 말 대신 그녀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현자가 은근한 미소를 짓고 그의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 챙겨주는 사이죠.”
엘리베이터가 멈췄던 날, 진욱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와서 긴 대화를 나누면서 현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의 연결에서 오는 따스함을 느꼈다. 감사의 뜻으로 현자가 진욱에게 식사 대접을 한 게 둘이 가까워지게 된 시작이었다. 한정식집에 다녀온 다음에는 진욱이 지방 출장길에 한과와 현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생선 젓갈 같은 걸 사 와서 현자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답례로 현자가 그를 집을 초대해 간단한 다과와 차를 대접하는 식으로 번갈아 만남이 이어졌다.
현자와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이 집에서 살았던 어머니의 존재가 진욱은 한층 사무쳤다. 항상 바깥 일로 바빠서 어린 시절 함께 한 추억은 많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에 따로 살면서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떠나보낸 어머니. 이제 채울 길이 없는 그녀의 빈자리가 실감 나면서도 현자와의 시간을 통해 그 공허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현자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가까이 두는 사람 없이 혼자 걸어온 그녀의 삶에 진욱이라는 발걸음을 곁에서 맞춰주는 동행이 생긴 듯했고 그건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따스한 일이었다.
오늘은 진욱의 차례였다. 밖에서 사드리고 싶은데 어떤 게 좋겠냐는 말에 현자가 족발이 먹고 싶다고 했다. 저녁 식사 겸 찾은 동네의 족발집은 단체 회식이 잡혔는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가게를 채우고 있었고 술기운에 시끌벅적했다. 빈 테이블이 하나 있었지만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욱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현자가 포장해서 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챙겨주는 사이.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난 지금껏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나, 경미는 생각해 봤다.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엄마가 잠시 눈앞을 스쳤으나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날 딸로 생각하기는 할까. 엄마하고는 서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고 통뼈라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단단한 체구인 경미와 달리 그녀는 자그마한 초식동물이 연상되는 듯한 조용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빠의 피가 더 많이 섞였을 거야. 본 적도 없고 아무런 기억도 없는 아빠.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만 짧게 들었을 뿐 엄마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아빠를 꼭 닮아서, 날 볼 때마다 떠올리기 싫은 옛 생각이 났을까. 그래서 날 그렇게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 살아온 걸까. 경미는 마치 엄마와 아들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괜스레 부아가 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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