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건식은 지난주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만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데이트하고 건식의 원룸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문제는 결혼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내년이면 서른다섯이 되는 여자친구는 건식과의 결혼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건식은 그렇지 않았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혼에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었으나 건식은 결혼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혼자인 게 편했고 결혼과 함께 올 책임과 기대를 짊어지기 싫었다. 결혼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고 가길 몇 차례 되었을 때 건식은 여자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너도 결혼할 사람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 또한 울거나 보채지 않고 담담하게 수긍했다.
“오빠는 그렇게 평생 혼자만 바라보고 살 거구나. 알았어. 그동안 즐거웠어”
건식은 슬픈 마음이 들거나 자신의 말이 후회되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거니까. 가지는 게 없으면 잃을 것도 없고. 원하는 게 없으면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는 거니까.
“형 요즘 신나 보인다”
건식보다 한 살 아래인 오경근 과장이 건식의 모니터를 보며 옆자리에서 말을 걸었다. 건식은 팀원들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다. 함께 어울려 점심 식사도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데 섞여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귀찮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팀원들도 건식에게 굳이 다가오지 않았으나 경근은 예외였다. 스스럼없이 건식을 형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었고 가끔 퇴근 시간 전에는 가볍게 소주 한잔 하자며 청하기도 했다. 매번 거절하는 건식이었으나 어쩌다 한 번씩은 매달리는 경근과 회사 앞 선술집을 가기도 했다. 주로 이야기는 경근이 하고 건식은 대충 대꾸만 하는 편이었다.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나 흘러 다니는 소문에 어두웠던 건식은 그런 자리에서나마 경근을 통해 전해 듣곤 했다.
“팀장이 시키니까 해야지. 콕 짚어서 날 짚었는데 어떡하냐 그럼”
“그래도 그냥 하는 느낌이 아니니까 그러지. 옆에서 보면 초사이어인처럼 뭔가 파바박! 한다니까 형 지금”
건식의 모니터에는 2주 뒤 예정된 메시 소프트의 신규 론칭 게임의 경쟁 PT 제안서가 작성 중이었다.
호진은 매우 놀랐다. 평소에는 팀 회의에서 한 마디도 열지 않던 건식이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단문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오픈 월드 게임이라는 건 원래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모험 놀이를 즐겨 하던 미야모토 시게루가 도입한 건데요. 젤다 시리즈에서요. 그런 요소가 이 게임에서도 잘 구현되어 있다면 유년기의 판타지를 터치하는 광고 콘셉트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팀원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지금 이게 이건식 과장이 한 말이 맞는 거야? 호진은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뭔지 더 해보라는 눈빛으로 건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렇다는 거예요. 아직 게임을 못해봤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과장이 게임에 대해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지 몰랐네. 그럼 광고주가 베타 플레이할 수 있는 링크를 준게 있거든. 거기서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 그러면 먼가 구체화될 것 같은데”
호진의 말에 팀원 모두가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건식을 바라봤다. 건식은 팀장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실은 조금은 설렜는데, 아직 오픈되지 않은 게임을 먼저 해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건식의 가슴이 뛰는 대상은 매우 한정적이었고 그중 하나가 게임이었다. 퇴근 후 사람을 만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살지도 않는 건식은 남는 시간을 게임하면서 보냈다. 콘솔 게임부터 온라인 게임까지 손대는 게임의 폭은 넓었고 시작한 게임은 거의 클리어하거나 높은 레벨까지 올랐다. 세상에 무관심하고 그저 귀찮을 뿐인 그에게 게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분지 같았다.
그날 퇴근 후 바로 들어가 본 게임은 꽤 괜찮았다. 중세 조선을 배경으로 한 세계관은 전통적인 서양 RPG의 구성을 토대로 한국 고유의 문화가 잘 접목되어 있었다. NPC와의 대화 및 주어지는 퀘스트도 초심자부터 꽤 하드코어 한 게이머들까지 배려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통할 만하다고 건식은 생각했다. 밤을 새우며 게임을 파악한 건식은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과 함께 아직은 모호하지만 광고 방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침 6시였다. 바로 회사로 향한 건식은 자리에서 제안서의 플롯을 짜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건식은 광고 콘셉트에 더해 광고의 스토리라인까지 완성했다. 팀 리뷰에서 자신이 만든 30 페이지 분량의 제안서를 설명했을 때 호진을 비롯한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함께 자리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자기가 더 할 게 없다면서 바로 섬네일로 그리면 될 것 같다고 감탄했다. 호진은 미팅 후 바로 건식을 데리고 희철 상무의 방으로 갔다. 제안서 내용에 대한 임원의 최종 승인을 위해서였다. 리뷰는 30분도 안되어 끝났고 바로 승인됐다.
“너 솔직히 말해봐. 놀랐지?”
수고했다는 말과 내가 광고주라면 당장 이걸로 한다는 칭찬을 마치고 건식을 먼저 내보낸 뒤, 희철이 호진에게 말했다.
“상상도 못 했어요. 이 친구가 이렇게 잘 할 거라 생각 못 했거든요. 이 정도면 어딜 가도 거의 최고 수준인데요”
“건식이가 평소에 보면 나사 하나 빠져있는 것 같고. 뭐 매사 시큰둥 하잖아. 그런데 할 때 하는 애야. 그런데 걔가 이 정도로 게임에 꽂힐 줄은 나도 몰랐네. 너네 팀에 맡기길 잘했다. 사실 조금 불안하긴 했거든. 너, 게임 잘 모르잖아”
호진은 건식의 활약으로 놀람보다 안심이 컸다. 희철의 말대로 종잡을 수도 없는 게임이란 것의 광고 전략을 만드는 데에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일주일은 걸려야 초안이라도 잡힐까 싶었는데 단 삼일 만에 정리가 된 셈이었다.
“이 과장 예전에는 지금과 달랐나요?”
“아니 똑같아. 왜 돌아온 탕아 같아서? 정확히는 게으른 천재라고 하는 게 맞겠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희철은 건식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이야기로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세상이 회색으로 보이기 시작했을까. 희철의 칭찬으로 제안서 리뷰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건식은 한숨 돌리며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왔다. 제안서의 내용을 메모해 놓은 이면지가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평소에도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책상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귀찮아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닌 무언가에 몰두한 흔적으로 보였다. 원래 이렇게 어질러 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건식은 엄마들의 꿈과 같은 아이였다. 조용하고 말썽 피우지 않았고, 자기 준비물을 알아서 챙기고 뭘 사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공부도 잘했다. 부모님의 기대는 나날이 높아졌고 건식은 그에 답했다. 반장이 되기를 원하면 선거에서 이겼다. 행정고시 출신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두 아들이 모두 수재라는 사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보다 더 큰 자부심이었다. 두 살 아래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너희들은 이 아버지와 서울대 동문이 되어야 한다’며 틈날 때마다 이야기하곤 했다. 아버지의 희망은 곧 어겨서는 안되는 명령이었고 형제는 충실히 따랐다. 건식이 외고에 입학할 때까지는 아버지의 꿈을 향한 여정은 순조로워 보였다. 동생은 조금씩 지쳐갔고 성적 또한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호통을 칠 때마다 ‘형을 봐라, 형 반만이라도 해라’고 했고 그럴 때마다 형제의 대화는 줄어갔다. 어떻게 동생에게 이야기해줘야 할지 건식은 알 수 없었다.
외고 시험 하루 전 동생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독서실 옥상에서 동생이 발견됐다. ‘싫다. 무섭다’라는 짧은 두 문장의 유서와 함께였다. 어머니는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집에 틀어박혀만 있었고 아버지는 빠르게 늙어갔다. 막내아들을 잃은 것이 슬퍼서인지 자신의 인생에 오점이 남아서인지, 무엇이 그의 탈모와 알코올 의존증을 만든 것인지 건식은 몰랐다. 수험생인 건식은 공부에 더욱 몰두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생각이 하기 싫었을 뿐이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무조건 외웠고 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꽉 막힌 듯한 가슴의 묵직한 통증을 잊으려 했다. 1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흘렀고 건식은 대학에 들어갔다.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입학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건식은 집에서 나왔다. 학교 간판의 힘으로 과외 자리는 많았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능도 있었다. 입소문을 타고 과외는 대학 생활 내내 끊기지 않았고 집에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수입이 유지됐다. 그 사이 아버지는 은퇴했다. 차관까지 노렸던 그였지만 한 번 망가진 평판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 듯했다. 지방의 작은 공기업 대표로 옮길 때 어머니는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고 남은 세 가족은 각자 살기 시작했다. 건식은 딱히 슬프지 않았다. 슬픈 것도, 기쁜 것은 물론 마음에 어떤 형태로든 감정의 파문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친구를 만들지 않고 전공 수업 대신 교양 과목만 골라 들었다. 건조하게 살았으나 게으르게 산 것은 아니었다. 수업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거의 매일 과외 수업을 했다. 남는 시간에는 원룸으로 돌아와 게임을 했다.
건식의 대학 생활 중 한 가지 열심히 한 것은 일본어 공부였다. 콘솔 게임 중 번역이 안된 것이 많아 귀찮아서였는데, 군대에서 계급이 올라 시간을 갖게 되었을 때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제대 후 바로 JLPT N1을 땄다. 졸업까지 1학기를 남기고 휴학한 후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일본을 돌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는 단기 임대로 한 달간 그냥 살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건식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타인들 틈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친구를 만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웃고 울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다들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 중이었다. 경영학 전공자들은 증권사로, 금융사로 취업하기 시작했지만 건식은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이상했다니까. 지금도 기억나. 그런 면접자는 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희철은 건식과의 면접에서 그가 한 첫 말이 아직도 기억났다.
“곧 없어지는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광고의 매력이 무엇이냐, 왜 광고일을 하고자 하는가를 물었을 때 건식의 대답이었다. 첫 질문에서 면접자의 포부와 열정을 알 수 있으리란 기대에 보란 듯이 어긋났고, 어쩌면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한 좋은 전략일 수 있었다.
“길어봐야 한 달이면 광고는 내리지 않습니까. 지겨워지기 전에요. 그런 짧은 수명이 전 좋습니다”
희철은 앞에 있는 면접자의 이력서를 다시 내려다봤다. 요즘 광고 회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함에도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기에 궁금했던 지원자였다. 이거 엉뚱한 물건이 하나 왔네.
“우리 스팅 애드에 지원한 이유는요? 대기업 계열의 제일기획 같은 곳도 같이 넣었나요?”
“아닙니다. 여기만 넣었는데요”
“허, 우리가 그렇게 인기가 좋은가? 왜죠?”
“대기업 계열은 꼰대 문화가 셀 것 같았고요. 남은 광고 회사 중에 원서 접수일이 여기만 남아서요”
허. 이게 자신감인지 싸가지 상실인지 헷갈렸다. 이어진 질문과 건식의 답에서도 계속 희철은 아리송했다. 면접을 마친 후 생각은 하나였다. 이 친구는 물건 아니면 불량품일텐데. 50%의 도박을 선택해야 하는 중에 아까 건식의 눈빛이 떠올랐다. 관심있어 보이는 내용을 이야기할 때 비쳤던 찰나의 반짝임. 희철은 자신의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근데 꽝이었어” 희철이 크크 거리며 웃었다.
“관심도 없고, 열정도 없고, 팀워크도 없고. 그런데 말이야. 일 년에 한두 번 터뜨리거든? 컴택 비딩 때 제안서 스토리도 사실 걔가 만든 거야. PT는 내가 했지만”
“그럼 이번 게임 제안서도 그걸 기대한 거고요?”
“그렇지. 대타로 가끔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만루홈런이면, 그 타자 쓸모 있는 거지”
2주일의 PT 준비 동안 호진은 크게 할 것이 없었다. 건식의 리더십은 훌륭했다. 팀원들에게 필요한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당했고, 크리에이티브와 미디어 플래닝 부서와도 틈날 때면 만나서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제안 내용을 다듬어 갔다. 경근이 팔을 걷어붙이고 건식의 부사수 역할을 자임하자 다희와 유진도 덩달아 몰입해서 달려들었다.
PT는 떨어졌다. 팀원들은 최근 준비한 경쟁 PT 중에서 가장 분위기도 좋았고 자신이 있었다며 침울해 했다. 탈락 전화를 끊고 호진이 자리에 앉은 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할 때 건식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나쁜 소식일수록 빨리 회사에 보고해야 했기에 호진은 바로 희철 상무의 방으로 갔다. 문을 막 열려는 찰나 격앙되어 지르는 희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문을 닫고 들어가니 희철은 통화 중이었다.
“뭐 이런 양아치 새끼들이 다 있어! 그럼 우리가 짜고 치는 판에 들러리로 들어갔다는 거야!”
분을 삭이지 못한 희철이 씩씩대다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아니 내가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야. 미안해. 하도 황당해서 그렇지.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다음 주 만날 때 내가 한 잔 살게. 그래. 수고”
“무슨 일이에요?”
“너 메시 떨어진 것 때문에 왔지?”
“네. 떨어졌어요. 제일기획이 가져갔다네요”
“그 건으로 전화 온 거야. 내 대학 후배가 조그만 온라인 대행사를 하는데 메시 소프트 PT에 제일 하청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거긴 좋겠네요. 게임이라 온라인 광고 많이 할 텐데”
“그런데, 걔가 말하길 이미 메시 놈들이 제일하고 하기로 판을 짜 놨던 거래”
“네? 우리하고 다른 두 군데는 그럼 놀아났다는 거에요?”
희철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임원 방이라서 피워도 누가 뭐라 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희철이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가끔 있는 업계 고질병인데, 이번에 더럽게 걸렸네. 미안하다. 내가 먼저 이렇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호진은 내색은 안 했지만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건식이 만든 제안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도 나무랄 곳이 없었다. 떨어졌다길래 대체 어디서 더 나은 제안을 했을까, 더 나은 기획이 가능하긴 한가, 광고주가 바보인건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실력으로 어쩔 수 없었던 정치적인 배경 때문이라 생각하니 덜 억울한 기분이었다.
“자 오늘부로 메시 건은 잊는 거야.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게 경쟁 PT지 뭐”
호진이 유산슬을 덜어 건식의 앞접시에 놔줬다. 경근이 자기가 하겠다고 했지만 수고한 건식에게 직접 주고 싶다고 호진이 한사코 고집했다. 건식은 자기 접시에 전복이 거의 다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팀장님 너무 건식이 형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서운합니다”
희철 방에서 나온 호진이 건식에게 지금 나가서 한 잔 하자고 했다. 떨어졌으니 팀 회식 명분은 없고, 고생한 건식에게 한 턱 쏘겠다는 것이었는데 경근이 따라나섰다. 한 시간 먼저 퇴근하는 개꿀 찬스라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임을 팀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난 확신하는데, 아마 메시 광고에 우리가 제안한 것들이 틀림없이 들어갈 거야. 그만한 콘셉트와 크리가 있을 수가 없거든”
호진의 말에 경근이 고량주 잔을 앞으로 빼 건배를 제안했다.
“그럼요! 제가 두 눈 크게 뜨고 나중에 광고 나오면 볼 거예요. 이 자식들, 조금이라도 무단 도용해 봐라. 바로 고소 크리 탑니다!”
건식은 자기를 바라보는 호진의 눈빛이 최근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아버지와 선생들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네가 어떤 기분일지 다 안다’는 듯한 동료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무조건 강요하고 대책 없이 기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서 과거처럼 몸서리 처지는 기분은 아니었다. 호진을 바라보며 건식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애 많이 써 주셨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아니야. 나도 이번에 게임에 대해 많이 배웠어. 그리고 이 과장 제안서 스토리에서 영감도 많이 받았고. 고마웠어”
경근이 “아니 형 나한테는”라며 바로 끼어들었다.
“그래 경근이 너도 고맙다. 과장 짬밥에 내 시다바리 노릇이나 하고”
“아니야. 난 형 멋있어서 돕고 싶었어. 뭐랄까. 초사이어인이 된 오공 옆에 있는, 그래! 크리링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지. 흐흐”
술이 조금 들어가서 인지 건식의 답이 평소보다 길어졌다.
“야 그래도 네가 크리링 전투력은 아니지. 피콜로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도 인간 최강자니 크리링으로 만족할래. 피콜로는 팀장님 정도? 앗 아니다. 오공보다 전투력이 낮네. 죄송합니다!”
호진이 ‘나는 드래곤볼 캐릭터 중에 뭐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건식이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무슨 피콜로야. 무천도사지. 한때 최강자였으나 이제 퇴물이 된?”
경근의 폭소 뒤에 두 남자도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할 때 주인이 서비스라며 짬뽕탕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을 일은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 (0) | 2022.01.19 |
---|---|
풀만 먹고사는 호랑이는 행복했을까 (0) | 2022.01.17 |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는 걱정 없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야 (0) | 2022.01.08 |
가설이 어쩌다 맞았다는 건 운이 좋았을 뿐 (0) | 2022.01.05 |
그래서 우린 엑스인 거야 (하) (0) | 2022.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