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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기획 2팀은 주간업무 회의를 한다. 호진은 오늘 회의에서 내년 사업 계획을 확정 짓고자 했다. 여느 회사가 그렇지만 광고 대행사의 사업 계획이란 결국 실적 목표가 다였다. 어느 광고주에게서 얼마의 광고 예산을 따올 것이고, 목표에 부족한 액수를 채우려면 신규 광고주를 어떻게 유치할지 팀원들과 의견을 조율해서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회사가 내려준 비현실적인 목표를 놓고 걱정하고 짜증 내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하고 대책 없는 희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팀의 가장 큰 광고주인 컴택은 한 달 전 애뉴얼 PT가 잘 끝난 덕에 내년 목표도 차질 없을 것으로 한숨 돌렸지만 문제는 연간 30억 광고주인 빅마트였다. 수도권 대도시에서 30여 개의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온라인에 치여 매출이 매년 줄고 있었다. 비용 절감 때문에 내년 광고비를 줄일 것이라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빅 마트, 어떻게 하면 될까? 고민이네. 잘해야 내년 10억 정도 할 거 같은데. 나머지 20억을 어디서 채우지?”
질문이기도 했고 하소연이기도 했다. 손병환 차장은 호진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이건식 과장은 팔짱을 끼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빅마트에 뭔가 매출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광고 캠페인을 제안하면 올해 정도 광고비를 만들 수 있을까?”
“해 봐야 안될 것 같은데요. 요즘 누가 마트에 가요” 김다희 대리의 어이없다는 반응에 호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눈치챈 오경근 과장이 바로 말을 받았다.
“광고로만 접근하면 아마 안 먹힐 거 같아요. 쿠폰 전용 앱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하면 어떨까요? 발 빠른 업체 하나 끼고 우리가 기획 및 대행을 하면 됩니다”
“쿠폰 준다고 앱 깔고 마트에 간다고요? 나 같으면 쳐다도 안 봐요. 빅마트가 뭐 대기업도 아니고. 업계 꼴찐데” 다희의 코웃음에 호진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이봐 김대리. 광고기획자가 받는 월급은 말이야, 광고주를 위해 걱정하는 게 팔십 프로야. 그렇게 광고주 망하라고 말하는 건 회의 자리에서는 조심해 줘”
호진은 말을 뱉고 아차 싶었다. 또 꼰대처럼 굴고 말았다.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인 다희의 눈빛에 어려있을 살기가 느껴졌다. 또다시 ‘갑분싸’해진 분위기에 손 차장이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유진 만이 눈을 또 반짝하고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아까 팀장 하는 말 웃기지 않았어? 진짜 말하는 거 하나하나 다 짜증 나. 우리가 무슨 광고주 노예냐고”
다희는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의 삼분의 일을 빨대로 한 번에 빨아 마셨다. 유진은 아무 말 없이 라테를 홀짝이고 있었다. 팀 미팅 후 호진은 장희철 상무와 빅마트 미팅으로 자리를 떴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여자들끼리 커피숍으로 수다 떨러 왔다.
“네가 봐도 너무하지 않아? 난 내 능력으로 월급 받는 거지, 같잖은 충성심을 바치는 게 아니야”
“대리님은 맨날 제일 늦게 퇴근하잖아요” 유진의 대답에 다희는 버럭 했다.
“그거야 내 자존심이지. 광고주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야. 나를 위해 서지”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는 다희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듯 유진은 손에 든 라테 컵만 보고 있었다.
“사실 내 아이디어도 이 회사 사람들은 받아들이 질 못해. 수준이 낮아서 그런 거야. 내가 언제까지 여기 다닐 거 같아. 좋은 데 오퍼 오면 바로 옮긴다 진짜”
유진은 머릿속으로 다희가 아이디어를 낸 장면들을 떠올려 봤다. 입사 후 아직 1년이 되지 않은 유진은 회의가 좋았다. 광고학 수업을 듣는 것처럼 열심히 메모하고 다시 중요한 내용을 워드 파일로 정리하면서 복습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다희가 낸 아이디어는 아무리 다시 되새겨봐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패션 브랜드 경쟁 PT 준비 때였다. 액티브 시니어 타깃의 신규 브랜드 콘셉트로 ‘요실금에 좋은 압박형 바지’를 내세워 ‘흘리지 않아요’라는 콘셉트로 핏대를 높일 때는 유진 자신도 모르게 노트에 ‘헐’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팀장이 한 말에는 유진도 솔직히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들 걱정을 해줘. 내 걱정 하기도 바쁜데’
“야, 그런 꼰대 짓을 했다고?” 희철이 운전대를 잡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그러다가 또 걔가 쓴 메일 대표님한테 들어간다. 전에 있던 안 팀장도 두 번까진 안 갔는데”
“아니 형, 어느 정도여야지. 다른 팀원들한테까지 물들까 봐 걱정이라니까요”
조수석에 앉아 호진은 아까 일을 괜히 말했나 살짝 후회했다.
“그런데 너 몇 년 안 본 사이에 변했다. 뭐랄까. 걱정이 많아졌어”
“그래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땐 이십 대 한창 좋을 때였고 지금은 세상이 다 걱정인 중년인데”
“그때 너 스킨헤드로 머리 밀고 수염 기르고, 흐흐. 하긴 그땐 나도 멋 좀 내고 다녔으니까”
“형하고 같이 다니면 좋았는데. 조금 유명하지 않았나 우리 둘?”
희철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일 걱정만 하면 됐을 때잖아. 가끔 여자 걱정하는 것 정도? 다 잘 될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도 좋았지. 젊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아니죠. 신경 쓸게 너무 많아”
“모든 게 걱정 거리로 넘쳐나지. 재테크 걱정, 은퇴하고 뭐하나 걱정, 중학교 딸 사춘기 걱정, 입스가 온 골프 걱정…”
호진이 옆에서 웃었고 희철이 오른 손가락을 운전대에서 떼어 천장 방향으로 세웠다.
“근데 말이야. 걱정이 너무 많아지면 병이 돼. 그래서 난 걱정을 안 해. 그냥 잊어버려. ‘렛 잇비’라고 그냥 놔두는 거야”
비틀즈의 렛 잇비 첫 소절을 부르다가 희철은 티베트 격언이라면서 가만히 읊었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참 절묘하다니까”
다희는 퇴근 후 원룸으로 들어오자마자 치킨 배달을 주문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사 온 수입 캔맥주 4개는 더 차갑게 식으라고 냉장고 냉동실에 넣어놨다. 원래 오늘은 필라테스 가는 날이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망할 놈의 팀장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울분이 가시지 않았고 치맥 생각이 점심시간 다음부터 간절했다.
‘그 꼰대는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전팀장은 대표한테 메일 한 번 쓰고 나서 조용해지더만’
치킨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TV로 UFC를 켠 다희는 호진의 얼굴을 피 범벅이 된 선수의 모습에 오버랩시켰다. 열심히 때리는 선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통쾌한 기분이 술기운과 함께 온몸에 퍼져갔다. 치킨 한 마리가 거의 다 뼈로 변했을 때 차오르는 배와 함께 다희 머릿속에는 걱정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걸로 몇 킬로나 늘었을까’
서른이 넘어가자 친구들은 하나둘씩 연애를 넘어 결혼하기 시작했다. 다희는 제대로 연애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 친구가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남자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이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니 다희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보다 자신이 뒤처지는 것 같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못하는 여자로 비칠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에게 무시당하고 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가뜩이나 과체중인 몸매를 생각하니 입가에 남아있는 치킨 기름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희는 바로 화장실로 가서 변기 시트를 올리고 얼굴을 숙인 뒤 집게손가락을 세워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호진은 출근 길에 렛 잇비를 계속 들었다. 비틀즈는 오랜만이었다. 영국으로 교환학생 갔을 때 리버풀의 비틀즈 성지를 다녀왔던 풍경이 기억났다. 걱정보다 희망이 많았던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 했다. 걱정을 없애는 건 불가능한 할지라도, 잊을 수 있는 다른 좋은 생각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다희는 출근하며 회사 앞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라테 벤티 사이즈를 주문했다. 평소에는 칼로리 때문에 아메리카노만 마셨지만 오늘은 이거 하나로 하루를 버틸 작정이었다. 우유가 식사를 대신할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제 술을 더 마시지 말아야 했어’ 한바탕 게워내고 나니 술 생각이 더 났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 참치 캔에 마요네즈를 뿌려 한 병 더 마시고 바로 잠들었다. 아침에 숙취가 남아 컵라면 물을 끓이던 중에 다희는 어젯밤에 온 카톡 메시지가 쌓여있는 것을 확인했다. 고등학교 동창 6명이 있는 단톡방이었다.
- 경은이 결혼한대
- 정말? 대박 축하
온라인 청첩장 링크가 웨딩 사진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 계집애 서른 넘게까지 고르다가 의사랑 결혼한다며?
- 축하해 경은아. 너네 자식은 머리 좋겠다. 너도 공부 잘했잖아
- 그래 고마워 얘들아. 이번 주말에 롯데월드타워 스카이라운지 예약해놨어. 저녁 살게
- 오! 쏘는 거야?
다희를 마지막으로 채팅창의 1이 없어졌다. ‘축하해 완전 기대됨’이라고 늦은 축하 인사를 올리며 다희는 아직 미혼으로 남은 게 누굴까 생각했다. 딱 두 명, 자신과 미정이었다. 친구들 중 가장 예쁜 미정은 승무원이었다. 질 수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 한 명이 되는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마침 라면 물이 끓었으나 바로 싱크대에 버린 다희는 주말까지 남은 날을 세워보았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나흘. 물만 먹고살더라도 지금의 모습으로 그 모임에 갈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라떼는 벌써 없어지고 빈 잔만 남아 있었지만 다시 대화의 꽃이 핀 단톡방을 보고 다희는 주린 배를 무시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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