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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고 있는 순댓국이 식기를 기다리며 첫 소주는 흰쌀밥과 마신다
짐은 얼추 다 꾸렸다. 내일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챙길 것은 휴대폰 충전 케이블과 면도기 등 몇 개 되지 않았다. 잊지 않도록 포스트잇에 메모해 놓은 호진은 시장감을 느꼈다.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생각하니 근처에 자주 가던 곳이라도 한 군데 들리는 게 좋겠다 싶었다. 몇 군데를 떠올리다 길 건너 순댓국집의 커다란 가마솥에서 생각이 멈췄다. 24시간 뼈를 계속 끓여댔기에 가게에 가득 찬 비릿한 뼈 냄새가 코 끝에 맴돌자 호진의 허기, 아니 술 생각은 어느 때보다 한층 강해졌다.
갓 지은 흰쌀밥은 왜 이다지도 단맛이 나는 걸까. 빈속에 들어간 소주의 칼칼한 목 넘김을 따끈하고 보드라운 쌀밥의 질감이 감싸 안았다. 호진은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밥은 씹을수록 은은하게 단맛을 풍겼다. 갓 내어온 순댓국은 뚝배기에서 팔팔 끓고 있었다. 그 뜨거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첫 잔은 밥 한술과 넘기는 것이 호진의 습관이었다.
기다려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오가는 말과 눈빛은 오해와 실망, 서로를 향한 적대감만 키울 뿐이었다. 식기를 기다리자는, 그러려면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호진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적당한 온도가 빨리 찾아오기를. 너무 식기 전에 서로에게 딱 그만큼의 온기를 건넬 수 있는 거리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양념은 후추 조금과 들깻가루 반 스푼이면 충분하다
들깻가루를 듬뿍 뿌리기도 했고, 빨간 다대기를 풀어 얼큰하게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딱 이 정도가 좋았다. 너무 많은 양념은 원래 이 집의 국물이 가지고 있던 향과 풍미를 두텁게 가려버리는 셈이었다. 언젠가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순댓국에도 통한다고 생각한 호진은 마치 세상의 비밀 한 가지를 깨우친 기분이었다.
알고 있었다. 작은 시도로는 무엇 하나 바뀔 수 없다는 것을.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그러나 호진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련이었을까. 호진은 자기가 잘하겠다는 약속을 반복했으나 같은 실수 또한 되풀이되었다. 끝이 없이 이어지는 악순환은 어둠이 드리워진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집안의 분위기가 냉랭해질수록, 서로의 대화에 날이 서 있을수록 참아보려 애쓰던 호진은 폭발하곤 했다. 악역의 역할을 벗어나고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심리 상담을 받았다. 집에서 받지 못하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특별한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들어주는 상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진작 이랬어야 했다. 내가 잘 해볼 게. 내가 바뀌어 볼 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이 모든 게 본질을 흐리게 하는 덧칠이었을지 모른다. 이젠 돌아갈 수 없음을, 점점 끝나 간다는 것을 애써 감추려 했다. 같이 있어야 된다는 강한 소망 때문에 넣어봐야 쓸데없는, 너무 많은 양념을 뿌려온 셈이었다.
# 젓가락으로 처음 집는 건더기는 투명할 정도로 익은 비계다
물컹한 질감이 순했다. 몇 번 씹지 않아도 목으로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곱게 익어 나온 작고 흰 그것이 호진은 좋았다. 순한 사람들 사이에서 호진도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슬픈 사실은, 역으로 순한 그들을 물들게 하진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이었다. 하얗고 투명했던 아내의 마음을 물들게 한 것이 다름 아닌 호진 자신이 아니었는지. 청명하던 아이의 눈망울 속, 저 어딘가에 호진으로부터 이어진, 자신에서 끝나고 사라졌어야 할 어두움이 숨어있었던 건 아닌지 두려웠다.
# 굳이 새우젓을 찍을 필요는 없다
싱거운 것은 싱거운 대로 좋다. 굳이 짜게 먹을 필요는 없다. 새우젓은 풍미를 돕는 것이지 짜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맛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호진은 살아왔을까. 아니다. 더 좋게 살아보려고 했다. 더 좋은 회사를 다녀보려고 했고, 남의 뜻대로 살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해보려 했다. 성공한 부분도 있었으나 넘어지고 깨진 적이 더 많았다.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실망과 좌절감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으나 그건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반칙이었다. 상대가 그걸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 가족은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 했을까. 호진은 생각해 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원하고 움켜쥐려 했던 것일까. 있는 그대로의 삶에 억지로 무언가를 더하려 했던 것일까.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아이의 성정대로 살아가게끔 충분히 믿어주지 못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내 삶에 무언가를 더 찍-어-보-려 했던 것일까.
#새우젓 종지의 파 몇 조각만 넣어도 국물 간은 맞는다
어쩔 수 없이 새우젓을 찍어야 하는 것도 있다. 호진은 다양한 부속고기를 구분할 줄은 몰랐으나, 붉은빛을 띤 것들이 대개 그랬다. 진한 내장 향이 강한 것들은 새우젓을 조금 찍는 것이 입맛에 맞았다.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고기에 작게 채 썬 파 조각들이 묻어 나왔고 새우젓에 찍을 때면 종지로 떨어졌다. 먹다 보면 새우젓 종지에는 파 조각들이 떠있곤 했다. 소주를 몇 잔 넘기고, 깍두기 등으로 입 안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처음엔 담백하니 딱 맞았던 순댓국의 간이 밍밍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종지의 파 조각 몇 개를 더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젓가락으로 쉽게 집을 수도 없는 그 작은 변화면 된다는 것을 왜 나는 그렇게도 법석 떨었는지. 호진은 후회했다.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좋은 아빠란 이래야 한다는, 편협한 내 기준을 아들에게 강요했을 뿐이었다.
“예전처럼 사이좋게 대해주세요”
어린 아들에게 큰소리치며 화를 낸 그날을 호진은 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야만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의 큰 존재가 소리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지를 생각하면 호진은 눈앞이 하얘지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그 아이가 받았을 상처와 절망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울면서 아이가 애원했던 그 말과 표정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럴 때마다 호진은 그때의 스스로를 격렬하게 미워했다. 자신을 경멸했다.
#식어야만 느낄 수 있는 맛이 있다
뚝배기도 결국은 식는다. 그 안의 맛도 변한다. 뜨거움이 사라지면 순대를 오래 씹을 수 있다. 툭하고 터져 나오는 당면이 탱글 대며 입안에 퍼진다. 식은 후에야 가능한 맛이 있다.
식었다. 식었기에 뚝배기를 만질 수 있다. 적당히 식은 뚝배기를 두 손으로 감싸면 손가락에 그 온기가 전해온다.
돌이킬 수 없음을 호진은 인정한다. 망가뜨렸음을 받아들인다. 식어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차가워져 버린 것이 있어, 다시는 예전의 온도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하지만 이대로라도, 이렇게라도 감싸 안은 손을 떼고 싶지 않다고 호진은 생각한다. 호진은 운다.
#순댓국 한 그릇에 소주는 한 병이면 족하다
마지막 잔을 채운 후 호진은 메모한 내용을 다시 읽어봤다. 첫 줄은 또박또박 적혔으나 술기운 때문인지 내려갈수록 글씨가 흐트러져 있었다. 개똥 철학이군. 버릴까 하다가 종이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을 때 핸드폰에 작은 진동이 왔다. 사진 앱이 저장되어 있던 예전 사진들을 편집해 보여주는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몇 년 전 이맘때 셋이 여행 갔을 때의 사진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이어 있었다.
순댓국은 없었다. 호진은 마지막 잔을 아주 조금씩 마셔가며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팠다. 하지만 분명히 행복했던 세 사람의 모습이 작은 화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더라도, 그때 거기에 분명히 존재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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