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유진은 어제 잠을 설쳤다. 어떻게 첫인사를 할지, 광고주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지 고민하다 보니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광고주로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 온 미팅 상황을 상상하는 유진은 설레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처음으로 혼자 광고주 미팅을 하러 가는 날이다. 이제 입사 이년 차, 어엿한 광고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전 이제 과장입니다. 하하. 그럼요. 시간이 꽤 지났지 않았습니까”
오경근 과장이 꽤 오랜 통화를 마친 후 바로 구호진 팀장 자리로 바로 갔다. 둘 사이의 대화가 오간 후 호진이 유진을 불렀다. 호진 책상 옆 보조 의자에 앉은 유진은 호진이 하는 말에 잠시 얼떨떨했다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진이도 이제 혼자 케어하는 광고주가 하나 생겼다. 잘 할 수 있겠어?”
“내가 대리 때까지 맡던 광고주인데, 한동안 광고가 없다가 다시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작은 전문대학인데. 광고주도 드세지 않고, 할만할 거야. 원래 이 학교는 막내가 머리 올리는 광고주인 게 우리 팀 전통이거든”
네, 작은 목소리로 답했던 유진은 이내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 자세한 내용은 오 과장한테 설명 듣고, 축하해”
호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파이팅 포즈로 격려한 후 경근이 자기 자리로 유진을 데려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호진은 자신을 노려보는 다희의 눈빛을 느꼈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또 대표에게 메일을 쓰든 말든, 네게 광고주를 단독으로 맡기는 건 자살행위야’ 호진은 생각했다.

올림픽대로는 꽉 막혀 있었다.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택시 안에서 유진은 반짝이는 한강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경근 말대로 순한 사람들이었다. 아직 앳돼 보이는 유진을 보고도 ‘광고 전문가 선생님’이라며 깍듯이 대하는 모습에서 유진은 긴장이 풀어졌고, 준비해 온 광고 방향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우리 소유보건대학은 간호학과 중심의 콘셉트가 명확한 학교입니다. 이 말은, 그쪽의 꿈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관련된 미래상을 보여주는 광고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맞는 말씀이네요. 아무래도 간호학과가 우리 학교에서 수능 점수도 가장 높거든요. 아주 좋은 생각인데요? 그렇죠 김 선생님?”
홍보실 이 과장이 흡족한 듯 웃으며 양 손바닥을 비볐고, 홍보실 막내라고 자기를 소개한 김 선생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 과장의 군청색 점퍼 어깨 위에 소복하게 쌓인 비듬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네, 그럼 다음 주까지 광고 콘셉트와 카피, 인쇄광고 시안을 만들어서 다시 찾아뵐게요”
“좋습니다. 아, 그리고…”
유진이 인사를 마치고 메모한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으려는 데 이 과장이 말을 이었다.
“그 뭐냐, 요즘 유행한다는 메타버스인가.. 그거 있잖아요. 우리도 해보면 어떨까 하는데, 그것도 같이 제안해 주세요”

‘메타버스는 그 자리에서 어렵다고 잘랐어야 했어’
택시에서 미팅을 복기하던 중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광고 예산이 빤한 소유보건대학이 메타버스까지 할 돈은 없었다. 만약 팀장님이나 경근 과장님이라면 부드럽게 그 자리에서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했을 텐데, 그들에게 괜한 기대를 하게 했다는 생각에 유진은 나는 아직 풋내기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잘했다. 정유진’
정체가 풀리기 시작한 듯 택시는 속도를 냈다.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는 한강의 물결이 반짝이며 유진 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왠지 기쁜 마음에 유진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약간의 감정의 흔들림에도 눈물이 나는 건 아빠를 닮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빠만큼은 아니었다. 아빠는 슬픈 것에도, 재밌는 것에도, 무서운 것에도 곧잘 울곤 했다. 어렸을 때 TV에서 하는 도라에몽을 보면서도 아빠는 울었다.
“있잖아. 나는 좋은 이야기를 보면 너무 좋아. 그 이야기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가졌을 기쁨과 슬픔을 생각하면 눈물이 그냥 나더라”
조금씩 커가며 아빠의 눈물을 보고 어이없어 웃기 시작한 유진에게 아빠는 겸연쩍게 말하곤 했다. 딱히 직업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네에서는 ‘정사장’이라 불렸다. 엄마와 함께하는 음식점의 사장은 공식적으로 아빠였기 때문이었다. ‘시골 삼겹살’집 장사로 부부는 두 딸과 막내아들을 키웠다. 삼겹살집이었지만 더 인기 있는 것은 두부전골이었다. 새우젓과 된장으로 만들어진 감칠맛은 엄마의 손맛 덕분이었는데, 아빠는 단골 관리는 자기가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 정사장님, 이리 와서 내 얘기 좀 들어 봐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무슨 속상한 일이 있어서 평소보다 주량이 좀 많으세요?”
주인 내외와 얼굴을 익힌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말다툼이 있을 때, 자랑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속상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을 때면 카운터에 앉아있는 아빠를 찾았다.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아빠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주방에 있는 엄마는 눈을 흘기면서도 계란 프라이 같은 안줏거리를 내어주기도 했다. 아빠의 맞장구에 어떨 때는 큰 웃음소리가, 어떨 때는 고개 숙여 나지막이 우는소리가 가게 안에 흘러 다녔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가풍 때문이었는지 유진은 대학교 전공으로 국문과를 택했다. 하지만 책 읽기 좋아하는 것과 이야기를 글로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유진은 글 쓰는 재주는 없었다. 모두들 그렇게 하기에 문예지 투고도 해 보았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유진 스스로도 몰입해서 쓴 것이 아니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대신 수업보다 더 열중한 것은 동아리 활동이었는데, 광고 동아리 애드홀릭의 동아리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총무, 부회장, 회장까지 학년마다 중요한 요직을 모두 맡을 정도였다. 광고 공모전 4회 입상이라는, 애드홀릭 역사상 가장 많은 입상 기록을 세운 것도 유진이었다. 하지만 자기는 1할 타자일 뿐이라며 쑥스러워 했다. 공모전에 40회 넘게 도전하면서 휴학 한 번 없이 보냈다. 졸업을 앞두고는 당연히 제일기획, HS애드 등 큰 광고 회사 순으로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대기업 계열 광고 회사의 서류 탈락과 최종 면접 탈락의 아픔을 겪고 업계 10위권에는 들어가는 스팅애드에 당당히 합격했다. 합격 발표날에 유진은 학교 앞 호프집 테이블 3개를 빌려 동기와 후배들에게 크게 한턱 쐈다. 술값은 이미 초반에 필름이 끊긴 유진을 대신해 뒤늦게 합류한 선배들이 내줬다.

“우리 딸, 이제 등단 작가를 넘어 출판하게 된 셈이구나”
아빠는 유진이 자신의 광고주를 맡게 됐다는 소식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국문과 입학 후부터 유진을 ‘정 작가’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 광고 회사 입사 후에는 “이제 너는 어엿한 등단 작가가 된 거나 마찬가지야”라고 축하하며 노트북을 사주기도 했다. 작가라는 별명이 전공에는 소홀한 채 광고 동아리에만 매달리는 자기 모습을 보고 놀리는 것이라 여겨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광고인이 된 후부터는 아빠가 부르는 별명이 기분 좋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게. 아직 작은 광고주지만. 내가 혼자서 뭔가를 책임진다고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부담도 되고 그러네”
“광고야말로 압축된 이야기지. 짧은 영상과 이미지 그리고 몇 줄의 문장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잖아. 어쩌면 농축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야. 참 매력적인 일을 하게 됐다. 우리 정 작가”

막상 글 쓰는데 몰입한 것은 아빠였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남이 만든 이야기에 빠져 울고 웃으며 살아오길 거의 50년. 이젠 나도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며 아빠는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재료가 얼마나 많니. 지금까지 내가 들어온 이야기만 더하면 웬만한 장편 대하소설 캐릭터가 나올 거야. 난 거기서 하나씩 골라 조심스레 닦아 글로 엮어내면 되니까”
대신 본업에는 소홀하지 않겠다며 식당의 ‘정사장’ 역할도 충실했다. 원래부터 잠이 별로 없던 아빠는 유진이 가끔 새벽에 일찍 깨는 날에 보면 어김없이 식탁에 노트북을 켜놓고 앉아 있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 돋보기안경을 끼고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자판을 치는 아빠는 곁에 다가온 유진의 기척도 느끼지 못하곤 했다.

“우리 딸은 대학 4년 동안 1할 타자는 됐는데, 아빠는 아직도 무안타네. 허허”
문예지 신인작가 공모전에 응모한 지 어느덧 4년이 되던 해,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으며 아빠는 아쉬운 웃음을 지었다. 가끔 자신의 습작을 수줍게 유진에게 보여주기도 했는데, 말은 못 했지만 전업 작가의 수준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이야기 꾼으로 살고 싶다며 등단의 꿈을 꾸는 아빠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당신의 평생 독자가 여기에 있어요. 유진은 자기의 마음이 아빠에게 전해지리라 믿고 있었다.

유진의 노트북이 놓인 작은 원형 테이블 주위로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좁은 홍보실 사무실에는 빔 프로젝터가 없었다.
“그럼 스팅애드가 준비한 소유보건대학 광고 캠페인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 미팅에서의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유진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차분하게 제안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검색으로 찾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자신이 학교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유진의 제안서를 검토하며 구호진 팀장이 “학교에 대한 애정과 보건 전문가의 꿈을 가진 학생들의 자부심이 아주 진솔하게 표현됐다”라고 응원해 준 것이 유진에게 큰 힘이 됐다.
“이상이 저희가 준비한 광고 콘셉트와 크리에이티브였습니다.”
PPT 파일이 마지막 검은 화면으로 넘어가며 발표가 끝났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흐뭇한 미소의 눈동자가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후 유진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One More Thing’이라는 문구가 노트북 모니터에 올라왔다.
“스티브 잡스 흉내를 한 번 내볼까 합니다. 지난번에 메타버스를 도입하고 싶다는 요청을 주셨죠. 그에 대한 고민의 답입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가진 예산과 시간을 따져볼 때 메타버스의 도입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면이 바뀌어 학교 홈페이지 화면 캡처에 보물 상자 아이콘이 합성된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메타버스도 결국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세상이죠.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메타버스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요..”
보물 상자 아이콘을 클릭하자 SNS에서 봤던 졸업생들의 일상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학생들이 보건 분야에서 활약하는 이야기가 홈페이지 곳곳에 숨어 있는 거예요. 마치 보물 찾기처럼요”

유진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며 막내 김 선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 선생님, 정말 신입사원 맞으세요? 어쩜 아이디어도 좋고, 발표도 차근차근 잘 하시고. 대단하세요!”
“오경근 선생한테 내가 들었는데. 대학교 때 광고 공모전을 휩쓸었던 광고 천재시래요!”
이 과장이 말에 이어 어쩐지, 김 선생이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유진은 못 들은 척, 쑥스러워하며 노트북을 닫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잠시 동안의 대화 뒤 유진이 일어날까 생각할 때였다. 김 선생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정 선생님, 제가 생각난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유진은 집어 들던 가방을 의자 옆에 놓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테이블에 올렸다. 김 선생의 눈을 마주하며 유진이 말했다.
“네 말씀 하세요. 저 이야기 듣는 거 좋아해요”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