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빈이가 먼저 결혼할 줄 알았는데, 쯧” 불콰한 얼굴의 전도일의 혀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사석에서는 형,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한지가 벌써 언제냐며 유영빈을 격의 없이 대하던 그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영빈은 그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에이, 형님, 그 이야기는” “뭐 어때, 내가 속상해서 그래. 어차피 여기 만호 씨도 알잖아. 같이 방배점에 있었으니” “제가 알다니요? 혹시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만호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는 이름을 전도일이 다시 한번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한유리 과장 말이야. 둘이 잘 되길 바랐는데” 이제 연락도 없냐는 전도일에 말에 영빈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잘 지내겠죠. 거기 생활도 안정된 것 같더라고요. 일도 구했고, 새로 사귀는 ..
LJ 그룹 본사 1층 로비는 퇴근하며 나오는 사람들로 한창 붐비고 있었다. 유영빈 팀장은 구석에 서서 만나기로 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문 쪽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얼마 만이야, 만호 씨, 아니지. 이제 정만호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네. 하하” “어휴, 점장님.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만호는 아직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영빈을 점장님이라고 불렀다. 그와 함께 있던 푸드 개발 부문의 전도일 셰프가 “아니, 아직도 점장님이라고 하네”라며 껄껄 웃었다. “그러게요. 방배점에서 있던 때가 벌써 2년 전이네요” 영빈의 눈가에 그리움이 스쳐 지났다. “오늘 미팅은 잘 하셨어요?” 밖으로 걸어..
한준의 차에 탄 한나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그럼 우리 먼저 갈게요. 두 사람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요” 하얀 입김을 머금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한나의 눈가에는 아직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민주 씨, 우리 또 만나요”라며 말한 후 창문을 닫은 한나는 차가 움직이기 직전까지도 애틋한 눈빛으로 민주를 바라봤다. “이젠”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 민주가 옆에 서 있는 만호에게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둘만 남았네요. 셰프, 추운데 들어갈까요? 할 얘기 있다고 했죠?” 만호는 고개를 든 채 밤하늘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베이킹 조리실의 조명이 켜지나 익숙한 풍경이 민주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한정판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초콜릿 가루를 부쉈을 때의 ..
마지막 손님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들에게 매장을 정리하던 민주가 밝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또 찾아 주세요”라고 인사했다. 이제 2층 매장에는 민주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는 그 공간을 그녀는 한참 동안 천천히 둘러봤다. 잠시 후 휘유, 짧은 한숨과 함께 매장의 조명 스위치를 내렸다. 그렇게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민주의 마지막 날이 끝났다. 영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직원들 모두가 민주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막냇동생을 어디론가 멀리 보내는 오빠의 표정을 짓고는 ‘건강해요, 가끔 놀러 오고’라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는 한 명씩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애써 명랑하게 예압,이라고 장난기 어리게 웃으며 답했다. 서한준이 어떻..
홀로 남은 매장 사무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강한나는 지금의 적막이 어색했다. 부점장으로서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늘 말을 건넬 점장이 있었다. 이제는 그 책상에 자신이 앉아 있다. 노트북을 열어 최근 매출 현황을 점검하고 메일을 확인해 봐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여기서 할 일은 없었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매장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유영빈이 이래서 계속 사무실 밖에 있었나 보네. 불편해서 못 있겠어’ 이른 평일 오전이라 손님은 드물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한나에게는 매장의 풍경과 직원들의 모습이 예전과는 어딘가 달리 보였다. 예전에는 매장 곳곳에 잘못된 곳이 없는가를 매서운 눈초리로 살펴보곤 했다. 오늘은 직원 중 누가 힘들어 보이는 사..
카페 토라세 방배점 아침 조회 시간. 사무실 중앙에서 유영빈이 나란히 옆에 선 강한나를 보며 말했다. “점장님, 조회 시작할까요” 영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한나가 목을 가다듬고는 맞은편의 매장 직원들을 한 번 둘러봤다. “오늘부터 방배점 점장으로 일하게 된 강한나입니다. 잘 부탁, 아. 부끄럽네요” 한나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쑥스러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직원 중 누군가 ‘강한나 점장님, 축하합니다’라며 시작한 박수에 모두가 함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어제 늦은 오후에 조직개편 발령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유영빈 점장의 본사 복귀는 이미 알고 있던 만큼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다. 매장 직원들을 술렁이게 만든 것은 두 건의 발령이었다. 강한나 과장 – 명) 방배점 점장 서한준 사원 –..
음식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갑지만 상쾌한 겨울바람이 영빈의 몸을 한차례 휘감았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소박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영빈은 가게 맞은편의 담벼락 쪽으로 걸어가며 담뱃불을 붙였다. 빈속에 계속 들이킨 술 때문에 정신은 몽롱했으나 오히려 속은 가벼웠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자 희미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자신의 입김과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닿는 작은 눈송이의 느낌이 청량했다. 유흥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골목 초입에 위치한 음식점이라 주변은 조용했다.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가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해온 방배점 가족들이다. 함께 켜켜이 추억을 쌓아온 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영빈은 다시 한번 쓸..
“그리고, 여러분께 알려야 할 내용이 있어요” 월요일 아침 조회가 끝나기 전, 유영빈 점장이 말끝을 흐렸다. 직원들은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숨죽인 채 기다렸다. 사무실 천장 쪽을 바라보던 영빈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다들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겠지만, 이번 주까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게 됐네요. 다음 주면 전 본사로 돌아갑니다” 역시 소문이 맞구나. 몇 직원들의 작은 탄식이 있었을 뿐 반응은 대체로 조용했다. 며칠 뒤면 정식으로 조직개편 발령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영빈이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며 작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 외친 ‘수고하셨습니다!’와 함께 박수가 시작되려 할 때 영빈이 잠깐,이라며 두 손을 저었다. “아직 한 가지 더 남았어요” “이제 민..
“점장님 오늘도 자리 비워?” “요즘 하루 걸러 하루는 본사로 가잖아. 그 소문이 진짜인가 보다” 강한나 매니저가 진행한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사무실에서 나와 매장으로 돌아가는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영빈 점장이 지난 주부터 부쩍 자주 본사에 가면서부터 ‘곧 점장이 바뀐다’라는 이야기가 직원들 사이에 공공연한 사실처럼 오르내리고 있다. 한나도 요즘 매장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빈에게 싫은 소리를 하진 않았다. 본사에서는 아직 복귀 발령도 나지 않은 영빈을 마치 신사업 프로젝트에 이미 투입된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원래 회사란 게 그랬다. 위에서 힘을 실어준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문화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조직에서 관심..
그새 많이 변했네. 영빈은 오랜만에 찾은 본사 마케팅부문 회의실이 영 어색했다.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던 빔 프로젝터는 천장 부착형으로 바뀌었고, 회의 때면 보드마카 펜으로 무언가를 적곤 하던 화이트보드 대신 한쪽 벽면이 판서 가능한 반투명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지난 회의의 흔적인 듯 고객 분석 데이터와 타깃 인사이트 등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영빈은 빈 회의실에서 홀로 앉아 벽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옛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윤수 팀장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이십여 분 정도 지난 후였다. “영빈아, 내가 불러놓고 늦어서 미안하다. 앞 회의가 생각보다 늦어졌네” “아니에요. 무슨 회의였는데요?” “뭐겠냐. 이맘때면 늘 하는 내년 사업전략 회의지. 전략 애들은 어차피 마지막에 지들 맘대로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