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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길 가야만 하나. 청첩장을 손에 들고 진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 토요일 결혼식이다. 주소를 보니 낯선 지방이지만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법한 위치였다. 정작 마음에 걸리는 건 결혼을 알려온 신랑이 경조사를 챙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축의금 이체로 대신할 수 있으면 그걸로 할 텐데 청첩장을 몇 번씩 살펴봐도 ‘마음을 전하실 분’에게 안내하는 계좌 번호는 없었다. 카카오뱅크 이체도 하기 어려웠다. 그의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카톡 친구 메뉴를 업데이트해도 친구 목록에 뜨지 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진욱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디지털과 먼 존재였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 그와 만난 곳이 온라인 커머스 회사였다는 게 농담처럼 느껴졌다.
대기업 계열의 오픈마켓 회사에서 송진욱 대리는 마케팅 담당으로 일하고 있었다. 신입 사원으로 취업했을 때는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모바일 업계로 돈이 몰리는 호황기였고 만들어진 후 삼 년이 되기 전에 통신사 대기업이 그가 일하던 회사를 사버렸다. 창업자는 떼돈을 벌고 바로 엑시트 해버렸고, 몇 안 되던 직원들은 한순간에 어엿한 대기업 명함을 새로 파고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한 해 한 해 연차가 올라가며 대기업 수준으로 인상되는 연봉 또한 짜릿한 희열을 줬다.
한도윤은 모기업에서 진욱의 회사로 발령받아 온 사람이었다. 진짜 대기업 출신 인재가 온다는 소식에 마케팅 팀원들은 기대와 함께 벌써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한 열등감 또한 가졌다.
“여기는 프로모션 담당인 송진욱 대리.”
도윤의 발령 첫날, 팀장이 한 명씩 돌아가며 소개를 해주었다.
“반갑습니다. 한도윤 씨. 잘 부탁해요.”
진욱보다 연차가 낮은 듯 아직 사원 직급이었다. 악수하면서 좋은 인상을 준다는 게 힘이 과했는지 도윤은 눈썹 사이를 살짝 찌푸렸다. 진욱이 받은 첫인상은 ‘남자 치고는 선이 곱다’였다. 게이로 오해받는 경우가 꽤 있다고 나중에 도윤이 말한 적도 있었다. 너무 마르지도 살집이 붙은 것도 아닌 평범한 체구에 175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키. 체크무늬 셔츠와 짙은 감색 면바지, 갈색 캐주얼 구두의 옷차림도 평범한 청년 직장인의 표본으로 보였다.
“우리 몰도 전문적인 UX 라이팅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본사에서 인정받고 있는 카피라이터를 어렵게 영입했어요. 서로 많이 배우고, 도윤 씨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잘 챙겨 주세요.”
팀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마무리 인사를 남겼다. 실은 좌천 비슷하게 미끄러져 여기로 온 것임을 모두가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윤 씨. 어제 단톡방에 올렸는데 확인 안 했어요? 매장 이제 오픈해야 하는데, 키 비주얼에 올릴 카피가 아직 안 됐잖아요.”
“전 카톡 안 해서요. 못 봤습니다.”
도윤의 똑 부러진 대답에 진욱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몇 개 만들어 놓은 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골라 쓰시죠”라며 도윤이 이면지를 내밀었다. 손글씨로 쓴 3개의 카피가 보였다. 모두 나쁘진 않았다. 진욱은 타이포 작업을 위해 바로 디자인팀으로 뛰어가며 생각했다. 이거 완전 아날로그 인간이구만.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인터넷 검색용 크롬과 MS워드 딱 두 개. 그마저 카피는 직접 손으로 쓸 때가 더 많다. 메신저 프로그램은 깔지도 않았다. 도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건 사용하던 2G 폰이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기능은 여전히 통화와 문자뿐이었다. 카카오톡, 유튜브, 게임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키보드 자판 칠 줄은 아나 봐요. 메일에 답장은 오던데요?”
“생긴 건 안 그런데 도윤 씨 무슨 조선시대 선비 같아. 가끔 카피도 종이에 손으로 써서 주잖아?”
“가만 보면 옷 입는 것도 좀 구려. 90년대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지 않아요?”
여직원들이 그에 대해 수군대는 걸 엿듣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본사에서 여기로 좌천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게 도윤에 대한 공통된 생각이었다.
도윤과 그나마 가까이 지낸 건 진욱이었다. 사무실 파티션이 옆으로 붙어있어 가까이 앉은 이유도 있지만 그의 독특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카피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획자인 자신의 의도를 잘 이해했고 진욱은 도윤이 쓴 카피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왜 IT 업종으로 온 거예요? 이쪽 성향은 아닌 것 같은데”
일산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다녀오는 전철 안에서 진욱이 도윤에게 물었다. 자기가 상황이 안되니 둘이 대신 가서 중요한 세션들 내용을 정리한 후 공유해달라는 팀장의 업무 지시가 있었다. 도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이런 질문을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
“그 말은 제가 회사에 안 어울린다는 뜻이죠?”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진욱이 말꼬리를 흐리다가 작정한 듯 도윤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난 개인적으로 도윤 씨 카피라이터로서 일 잘한다고 생각해요. 나하고 잘 맞고요. 그런데 굳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에서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어울리는 업계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가끔 들거든요. 조금 더 호흡이 여유 있고, 더 사람 냄새나는 곳. 정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실은 저도 그런 생각 자주 해요. 일은 일이다,라고 마음 다잡다가도 소모되고 낭비된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거든요. 그래도 뒤에서 쑥덕거리는 것보다 얼굴 맞대고 진심으로 이야기해 준 사람은 대리님이 처음이네요. 고맙습니다.”
도윤이 빙긋 웃었다.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도윤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지막 출근 날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하긴 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건지, 어디로 옮기는 건지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한사코 거절해서 환송 회식도 못했다. 진욱도 그날에서야 퇴사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었다. 그래도 나름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리 언질 해주지 않은 것이 못내 서운했다.
그게 5년 전이었다. 진욱도 그 다음 해 회사를 옮겼다. IT 창업 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업계에서 얼굴 몇 번 대한 적 있던 선배가 갓 만든 스타트업에 창업 멤버로 합류했다. 빨리 성공시킨 후 지분을 정리하고 큰돈을 챙기는 이른 은퇴를 꿈꾸며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 초반에는 투자도 원활했고 매출도 착실하게 증가했다. 직원을 더 채용하는 등 회사 규모도 커졌지만 이익은 여전히 만들기 어려웠다. 3년이 지나 비슷한 서비스가 연이어 등장하면서 매출이 조금씩 꺾였고, 실적이 주춤하면서부터는 시리즈 B 투자가 막혔다. 이제 직원 수를 줄여야 될 상황까지 왔다. 벌써 30대 후반의 나이. 진욱은 결혼은커녕 만나는 여자도 없이 일만 바라봤던 시간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이대로 고꾸라지는 건 아닐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동업자 선배와의 괜찮았던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도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였다. 회원 가입이 늘지 않는 이유를 진욱이 담당하는 마케팅 때문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자주 드러냈다. 공식 대표는 그였으나 아무것도 없던 초창기부터 자기 사업처럼 여겨왔던 진욱은 그게 못내 서운했다.
“진욱아. 네가 다 주도하려고 하지 말고. 밑에 애들 의견도 잘 듣고 그래야 돼.”
모두 퇴근하고 둘만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던 날,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마시며 선배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형도 알잖아. 애들이 아직 잘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꼼꼼하게 챙겨 줘야지. 그나마 경험 있는 게 나잖아요.”
“그게 아니라. 내 말 오해 말고 잘 들어. 너 혹시 IT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 없어?”
진욱은 입에 가져가려던 맥주 캔을 손에 든 채로 멍하게 그를 바라봤다.
“젊었을 때야 사는 게 트렌드 안에 있었으니 신경 안 써도 자연스럽게 일로 이어졌지만. 요즘 널 보면 요즘 흐름에서 벗어나 있어 보이거든. 처음 만났을 때보다 뭐랄까, 더 아날로그에 가깝다고 할까. 사고방식이나 스타일이 고풍스러워지는 느낌. 너란 사람 깊숙한 곳에는 이쪽 업계와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
“형.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형하고 나하고 회사를 여기까지 어떻게 키워왔는데. 마케팅에 불만 있으면 일에 대해서만 말해요. 나도 모르는 내면에 대해서 형이 분석할 권리는 없으니까.”
선배가 웃으며 미안하다고, 괜한 말을 했으니 잊으라고 무마하는 것으로 그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진욱의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채 가끔씩 진욱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정말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그렇지 못해서 일이 지금 이렇게 된 건 아닌가. 동시에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이 뒤를 이었다. 비슷한 말을 어디에선가, 누구에겐가 했던 것 같은데.
한도윤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작년 진욱이 부친상을 치를 때였다. 지병을 오래 앓으셨기에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가족들은 덤덤히 빈소를 지켰다. 화장과 납골묘 봉안까지 마치고 부의금을 정리할 때였다. 옛 회사명과 함께 적힌 도윤의 이름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진욱은 그가 써주었던 카피들의 필기체가 먼저 기억났다. 놀라움에 앞서 궁금함이 들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을까. 친한 몇 사람들한테만 연락을 했는데. 그렇다면 예전 직장 동료들 중 아직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나 말고 친한 사람이 있었던가. 빈소에서 얼굴은 못 봤는데. 와서 봉투만 넣고 간 건가. 왜 그랬을까.
더욱 놀라운 건 액수였다. 몇 번이고 확인해 봤지만 도윤의 이름이 적힌 봉투에 담긴 금액은 100만 원이었다. 얼굴 못 보고 지낸 지 벌써 몇 년 째인데 부친상을 챙겨준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많은 돈을. 우리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진욱은 아직 저장되어 있는 도윤의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간격을 두고 세 번 정도 시도했지만 통화연결음만 들려올 뿐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번호 주인이 바뀌었을까 싶어 문자로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다른 분이라면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 진욱 대리님. 부친상으로 황망하신 가운데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날 도윤에게 답장이 왔다. 그다운 고풍스러운 어투였다.
- 아니야. 내가 연락 안 했는데도 먼저 챙겨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금액을…
- 제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세요.
- 다음에 도윤 씨 경조사 있으면 꼭 연락 줘요. 보답할게.
- 네. 그럼요. 또 뵈어요.
짧은 문자 교환만으로 이어진, 언제 다시 끊어질지 모를 가는 실 같은 인연이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온 연락이 우편으로 도착한 도윤의 결혼 소식이었다.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몇 년 전 회사가 한창 잘나갈 때 신문과 잡지 인터뷰를 몇 차례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와 주소를 확인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요즘 다들 하는 모바일 청첩장이 아닌, 고풍스러운 종이 청첩장을 보내온 것이 과연 도윤 답다고 생각했다. 100만 원 부의금을 받았으니 그냥 모른 체 넘어갈 수는 없다. 계좌이체도 어렵다. 혹시 봉투를 부탁할 수 있을까 싶어 전 직장 동료 몇에게 한도윤의 청첩장을 받았는지 물었는데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다수였다. 어쩔 수 없다. 가자. 하루 여행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진욱은 날씨 앱을 켰다. 주말 동안 전국에 화창한 가을 날씨가 예상되었다.
차가 없는 진욱에게 차편은 간단치 않았다. 생소한 곳이었고 바로 가는 기차나 고속버스는 없었다. 검색해 보니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동네 규모인 듯했다. 근처 큰 도시의 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시외버스로 갈아탄 후 다시 40분가량 들어가야 된다고 지도 앱이 최적의 동선을 추천했다. 그나마 하루에 몇 편 다니지도 않았다. 진욱은 다시 청첩장의 주소를 확인했다. 특이하게도 웨딩홀이나 회관 같은 이름 없이 번지수만 표기되어 있었다. 가보면 알겠지. 내일 새벽 버스를 타야 해서 진욱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데 시간을 너무 보냈다. 하지만 예식 시간까지 여유는 충분했다. 드문드문한 차편 중 가장 빠른 시간의 고속버스를 탄 것이 다행이었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시외버스 안에는 노인 몇 명만 있었다. 도심을 벗어나자 바로 논 사이의 좁은 차도로 접어들었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도 짧은 구간마다 있는 정류장에 버스는 빠짐없이 정차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정취는 여유로웠다. 벼를 수확하고 난 후 바닥을 드러낸 논과 과수원처럼 보이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농장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파란 가을 하늘이 계속되다가 언제부턴가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했다. 잠이 모자란 탓인지 흐릿한 차창 밖 풍경처럼 진욱의 사고도 멍해졌고 곧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진욱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내릴 곳을 지나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버스에서는 도시와 다르게 차내 안내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긴장을 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버스는 멈춰 있었고 차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승객은 물론 버스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 된 일인지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기사가 들어오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일어났군요. 이제 슬슬 깨워볼까 하던 참인데.”
“네? 여긴 어딘가요?”
진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긴요. 손님이 내려야 할 곳이지. 왜 아까 탈 때 여기로 가느냐고 물었잖소. 도착은 했는데 워낙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죠.”
“얼마나…”
“글쎄. 한 이십 분 됐나.”
“이렇게 버스가 한 군데 오래 있어도 되는 건가요?”
“보시오. 여기 누가 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시골은 도시와 다르게 버스 조금 늦게 온다고 뭐라 안 해요. 남아도는 게 시간인 걸 뭐.”
기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 말에 진욱은 예식 시간에 늦은 건 아닌지 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일찍 출발한 덕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며 기사가 보여준 시골 인심에 감사함이 들었다. 서울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배려였다. 진욱이 버스에서 내리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그는 한사코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쳐가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고맙다는 인사만 건넨 뒤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진욱의 뒤로 기사가 말했다.
“나중에 갚아요. 또 만나게 될 거니까요.”
멀지 않은 곳에 이층 짜리 낡은 건물 몇 채가 모여 있는 곳이 나왔고, 거기로 향하는 길이 하나 있었다. 따라 걷다 보니 슈퍼마켓과 미용실의 간판이 보였는데 철판에 페인트로 그려진 곳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정육점 옆에는 여성복을 입힌 마케팅 두 개가 서 있는 옷 가게가 있었다. 여기가 나름 마을의 중심 상가인 듯했다.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윤의 결혼이 마을 경사여서 모두 거기 모여 있으려나. 진욱은 지도 앱을 켜서 청첩장의 주소를 입력해 보았으나 외진 곳이어서인지 추천 경로가 뜨지 않고 텅 빈 화면만 나왔다. 길을 물어볼 수도 없어 난감하던 차에 전봇대에 붙여진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도윤 결혼식장’이라고 쓰인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약도가 있었는데 조금 앞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나온다고 했다. 어차피 지금 진욱이 걷고 있는 길은 그쪽으로만 내어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단층짜리 주택이 나왔다. 마당이 꽤나 널찍해 보였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와서 처음 듣는 사람 기색이 반가웠다. 진욱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다. 가운데 무리 중에 검은 양복을 입고 보라색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활짝 웃으며 진욱에게 다가왔다. 도윤이었다.
“진욱 대리님, 정말 와 주셨네요. 먼 길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초대해 줬는데 와야죠. 여행길 같아서 좋더라고요.”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여기가 마음에 드실 겁니다.”
도윤은 악수를 하려 내민 진욱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진욱이 지금까지 본 그의 표정 중에 가장 기뻐 보였다. 그때 한 여자가 도윤 곁으로 다가섰다.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여긴 내가 말씀드렸던 송진욱 형님.”
형님? 그의 말에 진욱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석에서 술 한잔 나눈 경우도 없고, 형 동생 사이로 허물없이 지내자고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아직 조심스레 대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형님이라니. 결혼하는 날이고 여기까지 와준 게 고마워서 그런가 싶어 진욱은 피식 웃었다.
“안녕하세요. 이정인입니다.” 초면이라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신부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선이 고운 미남인 도윤과는 달리 정인은 윤곽이 뚜렷한 서구형 미인이었다. 옅은 화장기의 얼굴에 장식이 거의 없는 수수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 예식을 앞둔 신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스몰 웨딩이라고 하나요, 결혼식이라기보다는 그냥 친한 사람들 모여 식사라도 대접하는 자리로 하려 해요.”라고 도윤이 말했다.
과연 그 다운 결혼식이다 싶었다. 주례와 사회는 물론, 신부 입장 등 결혼식에서 하는 그 어떤 의례적인 것도 없이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건네는 간단한 인사말로 결혼식은 끝났다. 바로 뒤이어 마당 한 편에 마련된 상을 여러 개 이어놓은 곳에 다 같이 모여 미리 마련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인사도 못 드렸는데, 어디 계시지?” 진욱이 도윤에게 물었다. 그에게 형님이라고 불린 때문인지 어느 틈에 편하게 말을 놓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오늘 모시지 않았어요. 멀리 계시기도 하고, 미리 양해 말씀드렸죠.”
그렇잖아도 여기 모인 이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은, 오늘 부모님이 와서는 안되는 날이거든요. 저희가 꼭 초대하고 싶은 분들에게만 연락드렸어요. 사는 모습이 비슷한 사람들로요”라고 정인이 말했다.
그녀의 말이 진욱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부모님이 와서는 안된다니. 아무리 독특한 결혼식이라고 해도 도를 넘어선 것 아닌가. 그리고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 왜 내가 초대받았을까. 도윤과는 서로의 사는 방식이 어떤지 서로 알아갈 기회도 없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두런거리던 대화가 순간 한 번에 멈췄고 상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진욱에게 꽂혀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도윤이 “여러분. 환영합시다”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한 번에 입을 열었다.
“서울 사신다고요. 진욱 씨 잘 오셨어요.”
“환영합니다. 진욱 씨.”
“우리 잘 지내봐요. 진욱 씨.”
제각각 동시에 내뱉는 말이 겹쳐 환청처럼 잘 구분되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모두가 진욱의 이름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소개하지도, 도윤 부부를 제외하고는 말을 건넨 적도 없는데 저들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이곳에 있어선 안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진욱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저는 그만 일어날게요. 차를 가져오지 않아서 돌아가는 차편 시간 때문에요.”
“벌써 가시게요. 오늘 주무시고 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인이 굉장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진욱은 이미 대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도윤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한다”라는 의례적인 인사에 그는 빙긋 웃으며 한쪽 손을 들어 흔들었다.
“곧 봬요”
그의 눈빛에는 아쉬움보다 다른 감정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대 혹은 확신 같은 것이.
갑작스러운 불안함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정작 터미널로 돌아가는 버스가 언제 올지 진욱은 알지 못했다. 지도 앱이 먹통이어서 노선을 검색할 수도 없었다. 아까 내렸던 곳의 반대편으로 건너 가 정류장 표시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50 미터 정도 걸었을 때 세 명 정도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있는 간이 정류장을 발견했다. 앉은 후 고개를 드니 다시 청명한 파란 하늘이었다. 어디선가 새소리만 나지막이 들려올 뿐 지나는 차도, 정류장으로 오는 사람도 없었다. 이 고요함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용한 것일까. 결혼식장에서 본 사람들 외에 다른 존재의 흔적은 지나칠 정도로 지워져 있다. 이곳은 평화롭기만 한 정적을 넘어서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들여다보던 것도 그만두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욱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여기 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운전석 옆 문이 열렸올 때 오는 길에 진욱에게 마음을 써줬던 그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진욱은 웃으며 “또 뵙네요”라고 말했다.
“어,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일로 다녀갈 예정이어서요.”
“그냥 가게 놔두던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타세요. 터미널로 가보면 알게 될 겁니다.”
기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버스를 출발시켰다. 이번에도 승객 없이 텅 빈 채였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야 운영이 가능할까. 진욱은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시간을 기억해 봤다. 아직 넉넉한 여유가 있었다. 조금 이상한 경험을 했지만 기분 전환 상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하며 창밖의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올 때처럼 아침이면 모를까 정오가 지났는데 이상한 노릇이었다. 차창 밖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기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버스를 몰았다. 다행히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진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스에서 내렸다.
“어휴. 기운이 다 빠지네요. 원래 이렇게 자주 안개가 끼나요?”
기사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글쎄요. 손님이 가시는 게 못내 싫었나 보네요. 또 봅시다.”
글쎄요. 여길 또 오게 될 일이 있을는지.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매표소의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미안한 기색은 없었다.
“밖을 보세요. 안개가 이렇게 짙어서 오늘은 아무 운행도 없다니까요. 무리하다가 교통사고 나는 것보다는,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게 낫지 않나요?”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시간에 관대한 걸까. 진욱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쓰다듬었다. 스마트폰 신호가 안 잡히는 것도 안개 때문인가. 이래서야 택시 앱을 쓸 수도 없었다.
매표소 창구 하나와 열 내 남짓한 대기 의자가 있는 작은 규모의 터미널 안에는 벽에 걸린 TV 쪽을 향해 앉아 꾸벅이며 졸고 있는 노인 한 명뿐이었다. 매표소 위에 있는 운행 시간표에는 그나마 몇 개 되지 않는 노선이 모두 취소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꼼짝없이 여기에 갇혔다. 내일이 일요일이라 다행이었다. 지금 회사 상황에서 출근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운 대표와의 관계에 선명한 균열이 그어질 게 뻔했다. 안개가 자욱한 하늘은 햇빛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해 오후 3시를 갓 넘어가고 있는데도 저녁처럼 어둑했다.
진욱은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루 자고 가자, 터미널 주변이라 여관이나 모텔이 있을 테니 정말 여행 온 것처럼 하자고 생각했다. 두 군데 여관을 찾았으나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유리로 된 출입문 안쪽 바닥에 고지서 같은 우편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영업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보였다.
낭패였다. 이대로라면 잘 곳이 없다. 갑자기 피곤해진 진욱은 여관 앞 짧은 돌계단에 앉았다. 요금이 얼마가 되든지 간지 서울까지 갈 택시라도 불러야 할 판이었다. 휴대폰 전파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껐다 키면 될까 해서 전원 버튼을 누르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와 앞에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진욱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도윤이었다.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될 거라 생각해서 나와봤더니, 역시 여기 있었네요.”
정장에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어두운 보라색 라운드 스웨터에 느슨한 핏의 청바지 차림이었다. 도윤 뒤로 그의 아내 정인이 따라왔다. 그녀는 아까와 같은 하얀색 원피스 위에 도윤과 같은 보라색 카디건을 걸쳤다.
“어떻게 여기에? 이렇게 될 거라는 게 무슨...”
진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막막했던 가운데 아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 안도감과 함께 이유 모를 이질감이 스멀스멀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곧 만나게 될 거라고. 일단 타세요.”라고 도윤이 말하고는 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정인이 어느 틈에 진욱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왼팔에 팔짱을 끼고는 움직였다. 다소곳하고 수줍어하던 첫인상과는 달리 강한 힘이, 거부할 수 없는 의지가 담긴 듯한 압력이 그녀의 팔에 실려 있었다.
“안개 때문에 운전하기 쉽지 않을 텐데.”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조수석에 앉은 진욱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바로 뒷좌석에 앉은 정인이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함께 진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보세요. 안개가 우리에게 길을 내주고 있잖아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기준으로 안개가 빠르게 좌우로 걷히고 있었다. 뮤지컬 무대의 커튼이 젖혀지면서 배우가 등장하는 자리에 핀포인트 조명이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는 자동차의 앞 부분만 선명하고 주변은 짙은 운무에 쌓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진욱의 생각을 읽은 듯 운전대를 잡은 도윤이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반기고 있는 거죠. 형님을. 이 장소에 어울리는 사람이 영영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의 말은 비유가 아니다. 도윤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진욱은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악의도 없다. 단지 순수한 기대와 즐거움만이 목소리와 표정에 담겨 있다. 진욱의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아. 택시를 부를게. 아무래도 난 오늘 돌아가야 할 것…”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의 전파가 여전히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진욱은 말을 잇지 못했다. 등 뒤에서 정인이 쿡쿡대며 웃었다. 피부 위에서 털이 수북한 벌레가 미끄러지는 듯한 오싹한 소리였다.
“이제 스마트폰을 쓸 수도, 쓸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니까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이야기야. 버스 기사도 그렇고. 대체 여기는 어떤 곳이야?”
“당신이 찾아온 곳이죠. 초대한 것은 우리지만 선택한 것은 송진욱 당신이니까.”
정인이 말했다. 장난기 가득한 사춘기 소녀 같은 음색이었다.
“난 처음부터 알아봤어요. 형님은 나와 다르지 않다는걸.”
도윤의 말에 확신에 찬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
“우린 맞지 않는 거예요. 사람다운 게 사라지고 있는 이 뒤틀린 세상에. 영혼이 텅 빈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맥박이 뛰는 것, 인간다운 것만이 담겨야 한다는 걸 난 깨달았어요. 그래서 여길 만들어낸 거예요. 아까 만난 사람들도 형님처럼 한 명씩 초대받아 여기 영영 머무르고 있어요. 형님이 열세 번 째입니다.”
조수석 사이드미러에 자동차가 지나온 도로가 비치고 있었다. 해변가에서 썰물이 들어오는 영상을 빠른 속도로 재생하는 것처럼 안개가 움직이며 다시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안개의 색과 농도는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어둡고 짙었다.
“작별을 고하세요. 이제 당신을 위해 만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테니.”
정인이 뒤에서 팔을 뻗어 두 손바닥으로 시선을 가렸다. 진욱은 두 눈을 질끔 감아 버렸다. 잠시 후 차가 속도를 줄이고 좌측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동이 꺼지고 두 사람이 먼저 내린 후에도 진욱은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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