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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릿한 냄새에 영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에서 풍기는 악취가 잠결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틀 동안 안 씻고 있었으니 비단 머리뿐 아니라 온몸에 찐득한 때가 끼어있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조그만 원룸이 환했다. 창문에 반투명 커튼을 쳐 놓았지만 강한 햇빛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싱글 사이즈 침대 다섯 개 정도 크기의 공간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과 빈 컵라면 용기, 맥주 캔과 소주 병 때문에 더 비좁아 보였다. 쨍한 햇살 사이로 부유하고 있는 먼지가 또렷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창문을 열고 전자 담배 전원을 켰다. 점심시간인 듯 근처 중학교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상쾌했다. 일어나자마자 피는 담배 때문인지 영호는 마른 기침을 내뱉고 나서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몇 모금 들이켰다. 물이 반쯤 채워져 있는 플라스틱 병 하나만 있고 휑했다. 안에 있던 것들은 밤과 낮이 바뀐 이틀 동안 다 해치워 버렸다.
오늘도 안 나가야지.
영호는 긴 한숨을 내뱉고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먹을 것하고 술이야 배달 시키면 될 일이다. 오늘은 금요일. 회사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바로 사표를 쓰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사표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가슴속에서 단단한 돌덩어리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영호는 다시 눈을 질끔 감았다.
“이런 모욕을 받았는데도 이 빌어먹을 회사에서 버틴다? 허! 난 못 해. 바로 그만 둘 거야.”
제휴영업팀 김 팀장이 소주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호를 포함한 세 사람은 드럼통을 세워놓은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앉아 있었다. 불판에 올려진 삼겹살에 누구도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은지 오래라 고기가 바싹하게 말라가는 중이었다.
“당근이죠. 어제까지 내 밑에 데리고 있던 애를 어떻게 윗사람으로 대하면서 살아요. 난 죽어도 그 짓 못 해요.”
광고전략팀 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치고는 술이 센 편인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인사 발령으로 팀장 직책을 뺏긴 그들은 빈속에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래도 윤 팀장은 남편이 돈 잘 벌잖아. 외벌이인 나랑 김 팀장은 대책도 없어. 당장 생활은 어떻게 하려고.”
“배 팀장이 우리 중에 제일 억울하면서 무슨 말이야. 열 살이나 어린 팀장, 그것도 이제 갓 차장 진급한 여자애 밑에서 굽실거리며 살겠다고?”
영호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김 팀장이 버럭 소리쳤다. 화를 낼 대상은 회사인데도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한 듯 험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애라는 말에 윤 팀장이 자신을 쏘아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 회사에 바쳐온 시간이 얼만데. 배 팀장이 영업전략팀장 맡으면서 차세대 시스템 들여온다고 개고생한 거 다들 알잖아? 그런데 이렇게 내쳐진다니. 세 명이 동시에 면 팀장?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1월에 신임 대표가 오면서부터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사모펀드 출신의 재무통이자 구조조정 전문가인 그가 맡을 역할은 뻔했다. 삼 년간 누적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회사를 난도질해서 외형은 줄어들더라도 실속 있는 회사로 만드는 것. 그게 안되면 회사를 없앨 수도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업무 보고할 때 처음 본 대표는 공부만 해 온 순한 모범생 같은 인상이었다. 초면이기에 그랬을 테지만 대화할 때도 팀장들에게 경어를 썼다. 표독스러운 점령군을 예상했었는데 생각보다 점잖고 친절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회사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좋은 숫자를 만드는 데 주력하겠구나 싶던 안도감이 깨지는 데까지 채 세 달이 걸리지 않았다. 매주 있는 영업회의에서 대표가 마케팅 부문의 실적에 대해 아쉽다는 말을 요즘 자주 한다 싶더니, 난데없이 세 명 팀장을 보직 해제한다는 발령지가 화요일 오후에 올라왔다.
퇴근 시간은 한참 남았으나 김 팀장이 나가서 술이나 마시자고 메신저를 보내왔다. 술렁대는 사무실에서 팀원들이 자신의 눈치만 보는 분위기가 불편했던 영호는 윤 팀장과 함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도 마케팅 부문장은 외근을 나갔는지 자리를 비운 채였다.
안주 없이 마셔 술기운이 올라온 김 팀장은 불콰 해진 얼굴로 당장 사표를 쓸 거라고 계속 중얼거렸고, 윤 팀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당근이죠”라는 말로 거들었다. 그때 영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부문장이었다. 셋이 같이 있다는 영호의 말에 수화기 너머 한숨을 내쉬며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는데. 미안하다”라고 했다. 미리 알려주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뒤통수 맞은 기분은 아닐 텐데요,라고 하려다 영호는 말았다. 그도 한통속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두 명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며 금요일까지 쉬고, 다음 주에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 후 부문장은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보이지 않았지만 께름칙한 일 하나를 끝냈다는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그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기분 나쁜 휴가였지만 그동안 생각 정리하고 월요일에 같이 사직서를 내자는 결의를 억지로 한 후 영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변기를 부둥켜안고 몇 줌 안되는 액체만 입 밖으로 쏟아낸 다음 옷을 벗는 것도 잊은 채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눈꺼풀 너머 한낮의 빛이 느껴져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사표라는 단어만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두 명은 정말 회사를 그만두려는 생각일까. 3년 전에 경력으로 온 윤 팀장이야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신입사원부터 시작해 지금껏 다니던 김 팀장은 과연 그만 둘 수 있을까 싶었다.
다음은 어떻게 하지. 당장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뉴질랜드에 있는 딸아이와 아내에게 매달 보내는 돈은 또 어떻게 하고. 아무리 고민해 봐도 영호는 지금 회사를 그만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딸의 조기 유학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아내였다. 다른 엄마들처럼 초등학생일 때까지는 선행학습에만 신경 쓰는 것 같더니만 중학교 2학년부터 석차가 매겨지기 시작하자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소리가 아이를 향한 닦달로 변하기 시작했다. 느긋한 성격처럼 공부 스트레스도 좀처럼 받지 않던 딸은 마침 찾아온 사춘기까지 더해져 처음으로 대놓고 엄마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집 분위기는 두 여자 사이의 긴장으로 팽팽해져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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