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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 환경에 애가 적응을 못할 거 같아.”
최근 계속되는 야근으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영호를 아내가 부엌으로 불렀다. 그러고는 더 늦기 전에 뉴질랜드로 보내야겠다면서 유학원 팸플릿을 식탁 위에 늘어놓으며 영호에게 말했다. 상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게다가 여자애 혼자 보낸다는 건.”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야지.”
피곤에 절어 흐리멍덩하던 영호의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이 왔다. 말로만 듣던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건가.
“돈은 어떻게 마련하려고. 이 집은 어떻게 하고.”
“일단 전세로 돌려서 급한 대로 써야지.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작은 원룸 얻어서 거기서 지내 줘. 어쩌겠어. 애 잘 키우는 게 우선이잖아. 같이 딱 4년 정도 고생한다고 생각하자.”
좋은 건지 아니면 엄마 뜻에 따르기로 한 건지 딸은 평상시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입국 게이트로 들어갔다. 가족을 보내고 몇 주 동안 휑한 집에서 지내다가 전세 계약을 마치고 회사에서 전철 정거장 6개를 더 가야 하는 동네의 싼값의 원룸에 들어갔다.
시간은 빨리 흘렀다. 딸은 올해 있을 현지 대학 입시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기별이 뜸한지는 이미 오래였고 아내가 먼저 연락해 올 때는 생활비 때문에 돈을 더 보내달라는 말을 꺼낼 때뿐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런대로 해 왔는데.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월급의 3분의 2는 뉴질랜드로 보냈고 나머지 돈으로 월세며 생활비에 빠듯하게 써오며 살아왔다. 딸아이가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었다.
지금 이렇게 회사를 그만둔다면 기러기 아빠로서의 영호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 적지 않은 퇴직금이 나오겠지만 그건 까먹을 수 없는 마지막 동아줄이다. 편의점을 차리든 치킨집을 열든 노후 밥벌이를 위해 쓸 생각이었다.
사표에 가족, 노후까지. 그렇잖아도 하나같이 무겁고 머리 아픈 단어들이 한데 모여 빙글빙글 춤추는 듯한 어지러움에 영호는 눈을 떴다. 누워만 있었음에도 허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음식과 술을 같이 먹고 술기운에 빌려 잠들려는 생각으로 배달 앱을 켜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홈 화면에 여러 알림 창이 떠 있었는데 그중 제일 위에 올라온 문구를 보고 아차 싶었다.
- 오늘 오후 3시에 중앙공원에서 뵙는 약속, 변경 없는지요?
당근 앱에서 온 메시지였다. 오늘이 거래하기로 한 날이었지. 영호는 기타를 팔기로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는 나름 의욕이 넘쳤다.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처량한 신세의 기러기 아빠가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취미 생활을 즐기고, 건강도 챙기며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시 한번 솔로 생활을 의미 있게 보내자고 마음먹었고, 그 시작은 마음속으로 간직해 오던 기타를 배우는 것이었다. 마침 집 근처에 악기 학원이 있어 등록을 했고 강사가 추천해 준 일렉트릭 통기타를 샀다. 하지만 야근과 예기치 못 한 회식으로 몇 번 빠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기타는 몇 번 소리를 내보지 못한 채 케이스에 담겨 뽀얀 먼지만 뒤집어쓴 처지가 되어 버렸다. 결국 집에 오면 잠만 자는, 여느 기러기 아빠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영호도 결국 받아들이게 됐다.
무슨 바람에서인지 지난 일요일에 대청소를 했다. 처음 원룸에 들어올 때 단출했던 살림살이가 조금씩 늘어나 좁은 방안이 더 작아 보였다. 필요 없는 것들을 골라내던 중에 몇 번 쳐보지 못한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청소를 마치고 저녁에 중국 음식을 시켜 반주를 하다가 술김에 기타 사진을 찍고 몇 만 원이라도 벌어 보자는 생각에 당근에 매물로 올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반응이 벌써 온다는 반가움과 함께 너무 싸게 올렸나 싶은 후회가 동시에 왔다. 메시지를 보니 가관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몇 만 원을 더 깎아서 거래하고 싶다는 흥정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무료 나눔으로 주시면 감사히 쓰겠다는 말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일일이 답을 달다가 그마저도 열 건이 넘어가자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점잖은 말투의 메시지가 떴다.
- 아직 팔리지 않았다면, 제가 사고 싶습니다
- 네
영호는 뒤이어 또 셀프 할인 문구가 나올까 싶어 짧게 대답했다.
- 언제 어디서 뵐 수 있을까요
- 추가 할인 없어도 괜찮으세요?
- 네 지금 가격도 충분히 훌륭합니다
- 동네가 어디신데요?
영호는 이 사람과 거래를 끝내고 싶었다. ‘로망스’라는 대화명의 상대방은 가까이 살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고 술기운도 오른 채여서 영호는 내일 저녁에 괜찮냐고 물었다. 로망스는 평일 저녁에는 시간 내기가 어렵고 오후 시간이 좋겠다고 답을 보내왔다.
- 제가 회사 때문에 낮에는 시간이 안 돼서요
- 그럼 다음 주말에나 가능하겠군요
- 혹시 금요일 오후는 괜찮으세요? 3시 정도요
생각해 보니 다가오는 금요일은 한 달에 한 번, 매주 마지막 주에 있는 오전 근무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퇴근해 집에 들렀다가 기타를 챙겨 나갈 수 있었다.
- 좋습니다. 만나서 현금 드리면 되겠죠?
- 그렇게 하시죠
- 그럼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판매 완료라고 바꿔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꼭 그날 뵈러 갈 테니 걱정 마시고요
대화를 마치고 영호는 기타 케이스에 손을 올리고 한 번 훑어봤다. 별로 손은 대보지 못했지만 나름 정이 가는 녀석이었는데, 짧은 대화뿐이었지만 새 주인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때는 불과 이틀 뒤에 면 팀장 인사 조치를 받은 후 퇴사를 고민하며 초췌한 몰골로 집에서 뒹굴고 있을 거라고 털끝만큼도 생각 못 했다. 만사가 귀찮은 지금은 기타고 뭐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오늘 거래는 없던 걸로 하자고 메시지를 보내려 앱을 켰다. 영호는 로망스와의 지난 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쯧, 하고 입맛을 다시고는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나가자. 기타를 후딱 건네고 판 돈으로 술이나 사 오자. 어차피 대낮부터 마시는 것도 좀 그러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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