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간이 남았으나 나갈 차비를 마친 후 영호는 집을 나섰다.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민망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 장소인 공원에 도착해 중앙 광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일 오후라 주변은 한산했다. 영호는 핸드폰을 열어 로망스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봤다.
말투로 봐서도,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깎아달라는 말없이 바로 사겠다는 걸로 생각할 때 나이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백발에 인상 좋은 노신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은퇴한 교수님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별 어려움 없이, 더 이상 이룰 것 없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온 사람.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부러움과 함께 작은 질투가 발바닥에서부터 꼬물대는 것이 느껴졌다.
로망스의 프로필 사진은 컵이었다. 크기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카페에서 볼 수 있는 머그컵 같았다. 무늬 없이 그저 하얀색으로 된 단순한 모양이었고, 좌우 대칭이 안 맞아 윗부분이 왼쪽으로 찌그러져 보였다. 서투른 사람이 어설프게 만든 것 같은 티가 났다. 사진을 터치하자 화면이 이동되었는데 그가 거래한 품목이 20개를 넘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리스트에는 휠체어와 환자용 높이 조절 침대 같은 것들이 있었고 대부분이 거래 완료되었다고 나왔다. 그럴 법 한 게 모두 ‘무료 나눔’이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당근이죠?”
“네. 로망스 님이신가요?”
엉거주춤하게 벤치에서 일어나는 영호를 보며 상대방이 말을 이었다.
“옆에 기타가 있어 알아봤습니다. 먼저 와서 기다려 주셨나 보군요.”
영호의 짐작은 반만 맞았다. 로망스는 노인이었다. 그렇지만 중후한 노신사보다는 후줄근한 영감의 모습에 가까웠다. 훤히 벗어진 이마에는 가뭄을 맞은 논바닥처럼 짙은 주름이 서너 줄 패였고 허리 위 상체가 앞으로 굽어 있었다. 색 바랜 낡은 회색 면바지 안의 얇은 두 다리는 걷다가 넘어질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기타는 아드님이나 손주 주시려나 보죠?”
옆에 앉은 노인에게 영호가 물었다.
“허허. 아닙니다. 내가 한 번 쳐보려고 한다오. 기타 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나요?”
웃음에 불쾌하다는 기색은 없었다. 행색은 남루했으나 점잖은 말투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맑은 눈동자에 당황해서 그런 뜻은 아니라며 영호는 말을 얼버무렸다. 케이스를 열어 기타를 꺼낸 후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보시라고 하자 “내가 본다고 아나요. 깨끗해 보이는 걸로 봐서 거의 새것 같군요”라며 기타를 허벅지 위에 올리고 손가락으로 줄을 훑었다.
학교를 마치고 놀러 나온 초등학생들이 공원에 모여들었고 재잘거리는 소리에 주변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노인이 영호에게 현금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고무로 된 녹색 공이 그들 앞으로 굴러왔다. 노인은 공을 주워 달려온 남자아이에게 건네줬고 아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곧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던 노인은 다시 앉아 서로에게 뭐라 조잘대며 노는 아이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좋은 동네지요. 개발이 안 되어서 살기 불편하긴 하지만. 사람들도 순하고, 아이들 키우기 좋고.”
“네. 살다 보니 점점 정이 갑니다. 여기 오래 사셨나요?”
혼잣말인 듯 입을 연 노인에게 영호가 물었다.
“그랬죠. 젊어서 여기로 왔으니.”
또다시 말없이 공원만 바라보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떠납니다. 다음 달에는 이사를 가려고요.”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른 채 함께 침묵을 지키던 영호가 문득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당근에서 판매하시는 물건들을 아까 봤습니다. 무료 나눔이던데, 이사 준비 때문이었나 보네요.”
줄곧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정면을 응시하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영호를 바라보며 잠시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되느냐고 했다.
“왜 휠체어나 침대를 그냥 나눠줬느냐 물었죠. 팔았으면 돈 꽤나 받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빤히 아니까. 이젠 필요가 없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들한테. 가족 중에 누가 아파서, 그것들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 힘들 테니.”
“그럼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손자가 지체 장애인이었어요. 하나뿐인 가족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내가 키웠어요. 자식하고 며느리가 변변치 않아서. 그런데 그 녀석은 이제 없어요.”
마흔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날, 손자는 잠들고 난 후 눈을 뜨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는 열 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는데 몇 배를 더 살았으니 다행이었다며 노인은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번도 저렇게 놀아보질 못했죠. 그래도 내 품에 안아 키울 수 있어 좋았어요. 녀석이 커갈수록 나는 약해지고 늙어갔지만 여전히 금이야 옥이야 내 손길이 필요한 작은 아기 같았으니까.”
입술만 깨문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영호를 보며 노인이 빙긋 웃었다.
“이젠 내 역할이 끝나 버렸는데, 정작 이제부터는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러다가 불현듯 악기를 배우고 싶어졌죠. 기왕이면 기타 같은 게 좋겠다 싶더군요. 고마워요. 좋은 걸 팔아줘서. 그리고 별것 아닌 이야기도 이렇게 시간 내서 들어주고.”
인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영호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구부정하게 숙여진 어깨에 걸쳐진 기타 케이스가 무거워 보였지만 발걸음에는 다부진 힘이 실려 있었다.
영호도 일어났다. 점퍼 주머니에 넣은 손에 노인에게 받은 지폐가 만져졌지만 술을 사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주하던 노인의 눈빛이 계속 어른거렸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해야 할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우선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자. 평소보다 더 짧게 해서 깔끔한 모습으로 월요일에 회사에 가자. 집에 가서 청소도 해야겠다. 겨울옷은 한데 모아 세탁소에 맡기고 내일 아웃렛에 가서 조금 더 젊어 보일 수 있는 옷을 몇 벌 사야겠네. 그래야 젊은 팀장 모시고 회사 생활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일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까지 이어졌을 때 영호는 걸음을 멈췄다.
그래. 이렇게 주저앉아 버리면 안 되지. 퇴사는 무슨.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내겐 어떻게든 버텨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짧게 뱉어낸 한숨 후에 다시 깊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침 단골 미용실이 보였다.
‘아직 끝난 건 아니지?’
스스로 묻고 나서 영호는 이렇게 답했다.
당근이지.
(끝)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산 억제 작전 (하편) (2) | 2024.03.15 |
---|---|
출산 억제 작전 (상편) (1) | 2024.03.14 |
당근이죠 (중편) (0) | 2024.03.01 |
당근이죠 (상편) (7) | 2024.02.29 |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마지막화) (0) | 2024.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