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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은 올라가는 쪽 에스컬레이터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다. 빨간 소스가 올려진 덮밥 종류는 후보에서 뺐다. 어제 저녁으로 김치 볶음 덮밥을 먹고 나서 종일 뱃속에 알싸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제 소화 기능도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퇴근길 다리가 한결 무거웠다.
저녁이면 늘 붐비는 노량진역이지만 오늘은 한 시간 늦게 퇴근해서인지 반대편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사람이 더 많았다. 대부분 어린 청년들이었다. 공무원 준비 학원이나 독서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삼삼오오 모인 이십 대 남녀들로 시끌벅적했다.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 것인지 근처의 술집은 만원이었다. 15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 원룸으로 향하는 길이 정훈은 아직도 어색했다. 인근보다 월세가 싸서 이 동네로 들어오긴 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도 군데군데 머리가 희끗한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짭조름한 음식 냄새에 정훈은 시장기를 느꼈다. 노량진 컵밥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5천 원 정도면 배를 채울 수 있는 곳. 요즘 물가로는 찾기 힘든 가격이다. 줄지어 있는 컵밥 가게 앞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수험생 무리가 주문을 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직장인도 몇 보였는데 정훈도 그중 하나였다. 스무 개 정도 되는 가게 중 절반 정도는 시도해 봤다. 맛과 메뉴는 비슷했다. 흰쌀밥 위에 김치와 제육볶음, 고추장으로 버무린 오징어와 소시지 같은 간이 센 반찬을 올리고 계란 반숙 프라이로 비벼 먹는 방식이었다. 오늘은 조금 덜 자극적인 걸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정훈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 달 정도 전에 문을 연 일본식 덮밥집이었는데 밥 말고 면 요리도 팔았다.
“어서 오세요. 뭘로 드릴까?”
주인이 건넨 인사에 정훈은 메뉴판을 훑어본 후 “돼지고기 숙주 볶음면 곱빼기로 포장해 갈 것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다. 정사각형의 가게는 성인 세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 크기였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주인이 재료를 네모난 철판 냄비 위에 올려놓고 조리를 시작했다. 덮밥은 재료들을 올려 바로 내어놓는데 이건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었다.
“학원에서 학생 가르치는 선생님이신가?”
“네? 설마요.”
주인이 툭 건넨 말에 정훈이 깜짝 놀라 말했다.
“여기서 강의하는 사람이면 벌이가 엄청날 텐데요. 굳이 여기서.”
“그렇지도 않아요. 바빠서인지 여기서 사 가는 분도 꽤 돼요.”
이런 싸구려 음식을 먹겠냐는 뜻으로 들렸을까 당황한 정훈에게 주인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컵밥 자주 드세요?”
“네. 가볍게 배 채우기 좋아서요.”
“하긴. 우리 나이면 이제 많이 먹어도 소화가 안 되니까.”
우리 나이라니.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데. 슬며시 빈정이 상한 정훈이 주인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가게 여셨죠? 장사는 좀 어때요?”
“뭐 아직은요. 자리 잡는데 시간이 걸리려나.”
저녁 식사 시간은 지났지만 주변 컵밥 가게에는 서너 명 정도 손님이 한 손으로 그릇을 받쳐 들고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 집은 정훈 혼자였다.
“다 됐어요. 앞으로 자주 오시라고 넉넉하게 드려요.”
주인에게 받은 비닐봉지는 여느 컵밥을 받았을 때보다 묵직했다.
“여기 애들이야 책상에서 공부만 하느라 다들 어깨가 축 처져 있어도, 손님은 그러지 마세요.”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곳이라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던 정훈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주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 어깨가 쳐져 있나요?”
“세상 모든 짐을 다 지고 있는 것 같아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 나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데.”
“아까는 같은 나이라면서요?”
“에이, 그냥 해 본 소리지. 딱 봐도 한참 동생이구먼.”
묵직한 볶음면 무게 때문인지 싱긋 웃는 얼굴 때문인지 툭툭 내뱉는 주인의 말투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비닐봉지를 들고 시끌벅적한 술집이 빼곡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어깨가 쳐져 있다니. 주말마다 등산에 평소에도 가까운 거리는 대중교통 말고 걸어 다니는데. 정훈은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걷다가 불 꺼진 복사집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품이 큰 헐렁한 재킷을 걸친 키 작고 왜소한 중년 남자의 실루엣이 흐릿하고 비실비실한 게 영 힘이 없어 보였다.
정훈과 달리 아들은 또래보다 훤칠했다. 엄마 덕분이었다. 지금은 키가 더 컸으려나. 마지막으로 본 게 일 년 전이었다. 중학생이니 한창 클 때이고, 서양식으로 먹을 테니 이제 눈을 마주하려면 고개를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엄마와 함께 캐나다로 떠난 지 삼 년째로 접어들었다. 가족과 헤어지고 정훈은 노량진 원룸으로 들어와 기러기 아빠로 지냈다. 아침 식사는 거르고 점심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는다. 퇴근 후 안줏거리를 사다가 빈 방에서 술을 마시는 게 습관이 됐다. 그렇게 지내다가 건강 검진에서 위험 징후가 여럿 발견된 후에 바로 술을 끊었다. 여기서 잘 못 되어버리면 가족 뒷바라지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에서 음식 해 먹는 건 영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사 먹거나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기거나 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게 컵밥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정훈 곁으로 인파가 스쳐갔다. 빨리 벗어나려 잰걸음을 하던 공간을 정지된 시선으로 둘러보니 새삼 다르게 보였다. 정훈의 시선이 꽂힌 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안쪽으로 보이는 작은 출입문이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 재질 간판 위에 노란 페인트로 옛날 장난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상호인가. 술집과 밥집만 있는 줄 알았던 곳에 뜬금없었다. 정호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는 쪽과 올라오는 사람이 겹치면 몸이 부딪힐 정도로 좁은 계단 벽에는 오래된 영화 포스터와 LP 디스크 재킷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내려갔다. 전자오락실 같은 뿅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리 안된 창고 같았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물건들이 맥락 없이 쌓여있었다. 정신없는 걸로 치면 일본 여행 때 들른 돈키호테 매장보다 한 수 위였다. 전자 게임 소리가 나는 쪽에는 골드스타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브라운관 텔레비전 화면에 펭귄 한 마리가 빙하 위에서 달려가는 게임 화면이 비쳤고 그 옆에는 보물섬 만화 잡지가 수북했다.
정훈은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부터 구경해야 할지 난감한 중에 짜릿한 기운이 등을 타고 흘렀다. 이런 곳을 여태 모르고 지나쳤다니. 레트로 게임기와 카트리지 게임이 진열된 곳을 지나 색 바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진 괴수 장난감이 군대 사열대처럼 줄지어 서 있는 선반 앞에 섰다.
“냄새가 좋네요.”
정훈이 넋 놓은 채 어린 시절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느릿한 말투와 함께 왼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치고 정돈되지 않은 백발 곱슬머리를 한 나이가 지긋한 남자였다. “맛있는 냄새군요. 볶음면인가?”라는 말에 그제야 정훈은 손에 들고 있는 저녁거리를 바라봤다.
“저 앞 컵밥 거리에서 샀습니다.”
“왜 집에서 차려주는 밥 드시지.”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으레 집에서 가족이 기다릴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정훈은 생각했다.
“평소 혼자 챙겨 먹습니다.”
덤덤한 말투에 노인은 겸연쩍은 듯 풍성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정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주인이신가요. 재밌는 걸 많이 모아 놓으셨네요.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마음에 든다니 반갑군요. 보다시피 사람이 없어 적적하던 참이었어요.”
“이건 얼마나 하나요?”
정훈이 붉은색 가면을 쓴 파워레인저 모형을 조심스레 손으로 집어 올리며 묻자 노인은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힐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것들은 팔지 않아요.”
“네?”
“좋아서 하나둘씩 모아놓은 것들인데요 뭘. 얼마에 팔지 가격 매기는 것도 귀찮고 해서. 구경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 보는 게 좋을 뿐이에요.”
“유지비는 어떻게 감당하십니까? 지하라고 해도 번화한 곳이라 임대료도 만만치 않을 텐데. 혹시 건물주이신가요?”
자신의 일처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정훈을 보며 노인이 크게 웃었다.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나? 건물주이면 좋겠지만 아니에요. 그래도 벌어 놓은 게 있어서 조금씩 까먹어도 버틸 정도는 되지요.”
“그래도 수입 없이 이런 곳을 운영하시기가.”
“지금은 한산하지만 그래도 찾아와주는 사람들하고 단골이 꽤 돼요. 그냥 놀러 오기도 하고, 간직해온 걸 여기 놓아달라고 가져오기도 하고. 아무렴 이 많은 걸 다 내가 모았겠어요? 절반 정도는 받은 거예요. 어른들 놀이방이라고 할까.”
정훈은 여기서 한데 모여 서로 가져온 장난감을 보여주고 추억을 나누는 모습을 그려봤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또 오셨네. 입에 맞았나 보네요.”
일본식 덮밥집 여주인이 정훈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실은 어제 집에 도착해서 보니 볶음면은 식은지 오래였고 면도 불어 있어 제대로 맛을 보지 못했다. 다시 볶음면을 주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저기, 이인 분으로 부탁드려요”라고 말했다. 오늘은 누구 같이 드실 분이 있냐는 주인의 말에 정훈은 지하 가게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놀다 가는 요금으로 음식을 내어 놓아볼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볶음면을 같이 먹으며 좋아했던 예전 만화와 게임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눠보고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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