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약속 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었다. 다시 보게 될 얼굴들이 기대되면서도 한 편으로 쑥스러웠다. 먼저 도착해서 한 명씩 올 때마다 인사하기보다 차라리 조금 늦게 가서 다들 모여 있을 때 한 번에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가끔 부모님을 뵈러 들렸을 때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기에 느긋하게 여기를 거닐어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살던 집은 허물어졌고 철제 기둥 사이로 펼쳐진 회색 천막이 집 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택을 매입한 사람이 다세대 건물을 올릴 거라고 하더니만 벌써 공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당 양쪽에 서 있던 목련 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네 골목의 구조는 그대로였으나 기억에 남아있는 가게들은 보이지 않았다. 성당 가는 길에 있던 ..

늦가을 비가 아침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거리를 자욱하게 채운 썰렁하다 못해 스산한 기운이 가을을 지나 겨울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려오는 듯했다. 오늘처럼 궂은 날씨에는 시장을 찾는 사람이 뜸하다. 안경점이야 사람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늘 한가한 편이지만 그래도 가끔 ‘장 보러 나온 김에 요즘 눈이 흐려졌는데 싼 돋보기라도 하나 마련해 볼까’ 싶어 들어오는 어르신조차 기대하기 어렵다.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드문드문 스쳐 지나는 색색의 우산을 바라보며 성당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제 수연과 만난 후 꽁꽁 싸매어 놓은 채 꺼내보지 않던 얼굴들과 그때의 일들이 닫혀 있던 상자를 열고 하나둘씩 고개를 빼꼼히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반주단 소속으로 일요일 새벽 미사 오르간 연주를 담당했던 누나의 얼굴..

“ 사실 난 복사가 뭔지도 몰랐어. 엄마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복사단 들어간 거였지. 처음으로 제대 위에 섰을 때 엄마는 가문의 영광이라면서 미사 내내 울었어. 내심 복사에서 시작해 그대로 사제까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대를 못 이어도 괜찮겠냐고 아빠가 걱정하면 “그건 정 씨 가문 문제지 내 알 바 아니다”라며 슬쩍 웃었을 정도니. 그것도 모자라 우리 엄마가 너한테까지 수녀님 되라고 했었잖아. 옆에 있던 너네 엄마가 그 말 들었을 때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서 창피해진다. 수연이 너한테 몇 번이나 물어봤잖아. 저녁 미사 같은 거 하지 왜 힘들게 일요일 새벽 미사를 서냐고. 나야 엄마 때문에 붙박이였지만 말이야. 그래 놓고는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11시 교중 미사에 참석한다고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