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고 있는 순댓국이 식기를 기다리며 첫 소주는 흰쌀밥과 마신다 짐은 얼추 다 꾸렸다. 내일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챙길 것은 휴대폰 충전 케이블과 면도기 등 몇 개 되지 않았다. 잊지 않도록 포스트잇에 메모해 놓은 호진은 시장감을 느꼈다.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생각하니 근처에 자주 가던 곳이라도 한 군데 들리는 게 좋겠다 싶었다. 몇 군데를 떠올리다 길 건너 순댓국집의 커다란 가마솥에서 생각이 멈췄다. 24시간 뼈를 계속 끓여댔기에 가게에 가득 찬 비릿한 뼈 냄새가 코 끝에 맴돌자 호진의 허기, 아니 술 생각은 어느 때보다 한층 강해졌다. 갓 지은 흰쌀밥은 왜 이다지도 단맛이 나는 걸까. 빈속에 들어간 소주의 칼칼한 목 넘김을 따끈하고 보드라운 쌀밥의 질감이 감싸 안았다. 호진은 긴장이 조금은 ..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호진은 예전에 한 번, 같은 감정을 가졌던 적을 떠올리려 했다. 언제였는지 바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파트와 건물이 보이는 서울 시내를 지날 때까지 몰랐다가 경기도로 접어들어 풍경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야 기억났다.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왔던 때,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서의 막막함과 서글픔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며칠간 같이 있다가 돌아가는 아들이 서운해서인지 엄마는 음식을 잔뜩 했다. 밥상에 호진이 좋아하는 반찬이 가득했지만 몇 술 뜨지 못했다. 군 생활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대 앞까지 아버지가 운전해 주셨다. (호진을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에 5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진저리를 친 아버지는 다시는 데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호진은 방으로 ..
’30분 정도 늦겠다 미안’ 판교 역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호진의 휴대폰 화면에 장호황이 보낸 메신저가 떴다. 시계를 보니 저녁 여섯 시 십분 전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건 매번 있는 일이기에 호진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광고주 외근을 일찍 마치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온 것은 자신이었다. 그 동안 뭐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메시지 알림이 또 울렸다. ‘내리면 바로 백화점이니 거기서 놀고 있어’ 말 그대로 지하철 역 출구가 바로 백화점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느 백화점보다 훨씬 더 화려한 출입문 앞에 선 호진은 오픈할 당시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기사가 기억났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수와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평일 저녁이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호진은 백화점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하..
우산을 털고 계단을 내려갔다. 폐점 한 시간 전, 서점은 비 때문인지 한산했다. 호진이 예상한 대로였다. 이 시간의 풍경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드문드문하고, 챙겨 온 중고책을 팔려고 늘어선 줄은 없었다. 직원들의 얼굴엔 하루 일과의 피곤이 누적되어 있으나, 이제 또 하루 넘겼다는 안도감이 편안하게 걸쳐 있었다. 공간을 느슨하게 채우는 노곤함과 적막함에 호진 또한 느긋해질 수 있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진 않았다. 만화책 서가와 동화책이 있는 곳에는 한두 명 정도 있었다. 어린이 서적 코너에서 종이에 적어온 리스트를 유심히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책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은 대개 엄마들이었다. 학교에서 준비해오라고 한 ‘학년별 권장도서'를 찾고 있을 것이다. 호진 역시 아들이 저학년일 때 몇 년 간 했던 일이기..
한 시간에 한 번은 물을 갈아줘야 한다. 그래야 핏물이 잘 빠진다. 수입산 갈비일수록 잡내를 없애려면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은 필요했다. 붉은 핏기운이 없어질 때까지,고깃살이 하얀색으로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잡내를 빼는 또 하나의 비결은 앙념장에 있다. 배를 최대한 많이 강판에 갈아서 넣어준다. 생강 또한 적당한 양이라고 생각되는 것보다 두 배 정도 갈아서 넣는 것이 좋다. 진한 생강향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갈비가 끓어갈 때 소고기의 잡내를 생강이 가득 끌어안고 날아가주기 때문이다. 호진이 세 번째 갈비찜을 하면서 익히게 된 나름의 조리 비결이었다. ‘문성실의 레시피’를 기본으로 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처음 시도했을 때는 조금 짜게 됐었다. 레시피의 양념장은 고기 800g 기..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 걸어가면서 호진은 속이 또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1호선 역사 특유의 고린내같은 냄새가 지난 밤의 숙취를 끄집어 내고 있었다. 아무리 금요일 밤이었다고 해도 어제 너무 마셨어. 아우, 오늘 스터디에서 제대로 앉아 있을수나 있을까. 20대 후반이었던 호진은 열심히 놀았다. 매번 다음날 스터디에 영향이 있을거라고 걱정하면서도 금요일이면 늘 달리곤 했다. 오늘 아침 스터디로 가는 길은 유난히 힘들었다. 종각역에 있는 건물에서 토요일 아침 10시마다 모인지 벌써 이년 째가 넘어가고 있었다. 브랜드 원서를 매주 한 챕터씩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가끔은 주제에 맞는 케이스 스터디를 하며 토론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마케팅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제안 잘 들었습니다. 질문이 몇 가지 있는데요, 혹시 스타트업을 클라이언트로 일해본 경험이 있나요?” 화상회의 모니터의 얼굴들에 약간 당혹한 표정이 스쳤다. “자기 돈 넣고 광고하는 스타트업 사람들은, 퍼포먼스 광고에서 어떤 지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새로 교체한 광고 대행사의 제안을 받고 호진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예상했던대로 답은 두리뭉실했다. “어느 한 지표를 콕 집기는 어렵네요. UV를 보는 경우도 있고, ROAS에 민감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 요즘은 회원 숫자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게 트렌드이긴 하구요…” 호진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디지털 마케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근에 지인들의 스타트업을 도우며 그들이 광고 등 마케팅 하는 것을 보며 배운 것이 있습니다. 돈..
“What about Smiley?” (스마일리는요?) “He’s leaving with me” (나와 같이 그만두는 거야) 순간 표정이 흔들린다. 조지 스마일리 자신도 처음듣는 은퇴 소식이다. 1960년대 영국 첩보국 ‘서커스’의 리더 ‘컨트롤’은 실패한 스파이 작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했다. 내심 반기는 듯한 고위층의 질문에 그는 자신의 오른팔인 스마일리도 함께 그만둔다고 깜짝 발언을 했다. 남게된 자들의 환호하는 마음이 회의실에 떠돈다. 스마일리는 그 작전에 관여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한마디 항변도 없이 자신의 상관과 함께 평생을 바친 조직을 떠났다. 희끗해진 머리의 늙은 스파이, 최고 수뇌부까지 올라간 베테랑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담백했다. 이토록 간단하게 조직의 사다리에서 손을 놓..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나 영상 중 하나만 고른다면, 호진은 ‘참새가 옥수수 알갱이를 쪼아먹는 영상’을 택할 것이다.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와 아들의 목소리는 담겨 있을지 모른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평일이었다. 날씨 탓인지 롯데월드 매직 아일랜드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들이 옥수수 버터구이를 먹고 싶다고 해서 우산을 쓰고 나왔다. 비를 피해 자리잡은 ‘사과나무’ (정식 명칭은 ‘회전 그네'였으나 호진과 아들은 이렇게 불렀다) 옆 조그마한 전망대 아치 아래에는 참새들이 모여 있었다. 아들은 옥수수 조각을 떼어내 살며시 던져주었다. 빗방울 소리만 나즈막한 가운데 새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참새는 정말 ‘짹짹’하고 울었다. 그 장면이 신기해서, 별 생각없이 동영상을 찍어 놨을 뿐이다. 오늘 구글 ..
“디페시 모드 듣고 있었나봐요” 호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소개팅 상대가 자리에 앉은지 몇 분 안되어 꺼낸 말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듣고 있던 MP3 플레이어에 곡 이름이 띄워진 채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전성기를 한참 지난, 그렇게 대중적이지도 않은 신스팝 밴드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로수길에서 만난 소개팅 상대여서 그 사실이 더 신선했다. 얼굴이 다시 보였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 여자의 그때 표정을 호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호진은 그 날의 그녀가 보여준 모습과 표정을 거의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비가 보드랍게 내리던 초겨울이었다. 그리 춥지않던 날씨에 옷차림은 계절에 비해 가벼웠다. 검은 색 스키니한 바지에 검은색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