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영감님이 처음부터 신경 쓰인 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는 노인은 흔했으니까. 어느 열람실을 가도 종일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는 건지 졸고 있는 건지 모를 노인은 반드시 한 둘 정도 있기 마련이었다. 여길 드나든 지 세 달 정도 됐다. 처음에는 2층에 있는 취미와 문학 열람실에서 디자인 관련 서적이나 소설을 뒤적였다. 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추리 소설이나 무협지 비슷한 것들만 골랐다. 그마저도 재미있겠다 싶은 것들을 얼추 읽고 나서는 마땅히 손이 가는 게 없었다. 3층짜리 구립 도서관이라 책이 많지도 않았다. 책상에 앉아 있는 대다수는 공무원이나 공인중개사 시험 수험서를 펼쳐놓고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자리를 잡은 곳은 1층에 있는 정기간행물 열람실이었다. 신문부터 시..

병원이라기보다는 소박한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내과나 이비인후과와 달리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랐다. 피아노 선율의 재즈 음악이 흐르고 서양화와 사진 작품들이 곳곳에 보였다. 접수처에서 예약 시간과 이름을 말하자 지금 원장님은 진료 중이며, 10분 정도면 끝날 예정이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적절한 수준의 친절함이 담긴 간호사의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스칸디나비아 풍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여있는 잡지를 뒤적이며 희정은 기다렸다. 삼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원장실 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쪽으로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는 접수처로 가서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잠시 후 친절한 인상의 간호사가 희정을 원장실로..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은 준호를 희정은 꼭 끌어안았다. 이제 자신보다 훌쩍 키가 커버렸지만 아침에 이렇게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해온 등교 인사였다. “이따 한 시에 엄마가 공개 수업 갈게. 교실에서 만나.” 준호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현관문을 닫았다. 언제 이렇게 컸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릎을 구부려야 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냘팠던 아이가. 이혼이 마무리될 때까지 집안 분위기는 아무래도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준호는 한창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변해가는 시기였다. 정서가 민감한 때에 부모가 다투는 모습은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희정은 바닥이 무너진 고층 건물 옥상에서 수직 낙하하는 듯한 아득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까불대며 늘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