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이럴 거면서 왜 그리 서둘러 결혼했는지. 경미는 준호와 쇼핑을 마친 후 돌아와 희정네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곳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흰 벽지 아랫부분에 어린 준호가 그려 놓은 낙서만 남았다. 9개월 만에 둘은 결혼했다. 준호를 먼저 가진 속도위반은 아니었다. 한창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렇듯 그들은 한순간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너무 빠른 결정 아닌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경미의 만류에도 희정은 앞으로 펼쳐질 행복을 굳게 믿었다. 준호 돌 기념으로 찍은 셋의 사진에서도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는 확신이 그녀의 얼굴에 환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희정을 배신했다. 준호 아빠의 외도 때문이었다. “에고, 우리 사무장님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개드니..

준호가 유모차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빠는 그 크로스백을 메고 다녔다. 외출할 때 예비 기저귀, 간식거리, 물티슈 같은 것들을 넣고 다니기에 크기가 넉넉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나들이부터 해외여행까지 준호와 함께 할 때면 늘 그 가방이었다. 준호네 가족과 자주 어울리곤 하던 경미는 “형부, 어깨 아프겠다”라며 축 늘어진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잠든 준호를 안고 있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다. 아빠 생각이 났던 건가. 경미는 준호의 표정을 살폈다. 눈동자에는 슬픔과 비슷한,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아련함이 떠올라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나서는 걷다가 힘들면 작은 손으로 아빠의 가방을 아래로 잡아당겨 업어달라는 말을 대신했던 꼬마가 지금은 경미보다 커졌다. 그래, 가끔은 보고 싶기도 하겠지..

“언니 또 저기 앞 사거리까지 가서 유턴할 거지?” 경미의 장난스러운 핀잔에 운전대를 잡은 희정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반대편 차선이 비어있어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했지만 희정은 표지판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쳤다. 조수석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경미는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 안전하게 가자.” 둘이 탄 차는 삼백 미터 정도를 더 직진한 뒤 유턴해서 아까 그곳으로 돌아온 후 우회전했다. 영어 학원이 있는 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과 부모들이 세워놓은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경미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창문을 내리고 밖을 두리번거렸다. “응 준호야, 이모야. 엄마랑 같이 지금 막 도착했어. 조금 늦었네, 미안. 밖으로 나와 있니?” “저기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