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팅 애드 임원 회의가 끝난 후 희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한보경 상무가 다가왔다. “장 상무, 차 한잔하자” “그럴까요? 바로 선배 방으로 가시죠” 비서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며 분위기를 잡아가는 보경답지 않았다. 희철보다 2년 선배인 보경은 전략가보다는 영업맨에 가까웠다. 늘 허허 웃고 다니며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는 편인 그는 임원 진급은 희철보다 늦었지만 탄탄한 광고주 라인업을 갖춘 기획 2부문장을 맡고 있었다. 둘의 스타일이 달라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는 사이였다. “너 얘기 들었지?” 보경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희철은 무슨 일인지 짐작..
“여어, 여기야” 저녁 시간의 식당은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경근을 먼저 발견하고 안정호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경근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다섯 시에 광고주 연락 서 일을 시키는 바람에” “하하. 광고쟁이 숙명이지 뭐. 어디 애들이? 컴택?” 정호가 경근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경근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잔을 받았다. “아니요. 팀장님 나가시고 신규 영업한 데가 하나 있어요. 이제 막 투자 기 시작한 스타트업인데, 그쪽이 맨날 밤새 일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네요. 그나저나 어떠세요? 광고주 가니까 삶의 질이 높아지셨나요?” 경근과 잔을 부딪히며 말도 마라는 듯 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는 와 보니까 영업 판이야. 광..
유진은 어제 잠을 설쳤다. 어떻게 첫인사를 할지, 광고주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지 고민하다 보니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광고주로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 온 미팅 상황을 상상하는 유진은 설레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처음으로 혼자 광고주 미팅을 하러 가는 날이다. 이제 입사 이년 차, 어엿한 광고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전 이제 과장입니다. 하하. 그럼요. 시간이 꽤 지났지 않았습니까” 오경근 과장이 꽤 오랜 통화를 마친 후 바로 구호진 팀장 자리로 바로 갔다. 둘 사이의 대화가 오간 후 호진이 유진을 불렀다. 호진 책상 옆 보조 의자에 앉은 유진은 호진이 하는 말에 잠시 얼떨떨했다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진이도 이제 혼자 케어하는..
“야. 이름값 좀 해라. 이름은 무슨 무협지 주인공 같은 놈이 그렇게 소심해서야. 쯧” “송구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컴택 마케팅팀 강혁 팀장이 오쌍진 상무 앞에서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쌍진은 방금 회의에서의 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왜 재무부문 애들이 딴지 걸어올 때 한 마디도 못해? 걔들이 어이구 그러세요, 돈 쓰고 싶은 만큼 쓰셔야죠, 하는 애들이냐? 싸워서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도 스마트폰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데 전년 대비 광고판촉비 130% 증액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야 이 등신아! 네가 짠 예산 아니야?” 쌍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고 강혁은 그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맞잡은 두 손을 꽉 쥐며 고개..
손병환 차장은 오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오십 번 정도 했는데, 평소보다 두 배 많았다. 컴택의 신규 스마트폰 광고 최종 시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미 두 차례 시사를 마쳤고, 대표 이사까지 컨펌이 된 광고였다. 카피 폰트 등 몇 가지 미세한 편집만 남은 상황이어서 실무들끼리만 보기로 했고, 호진은 참석하지 않았다. 팀의 최선임인 손병환 차장과 정유진 사원만 컴택을 방문했다. “이거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나?”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오쌍진 상무가 예기치 않게 회의실로 들어왔고 다시, 다시를 3번 연속하여 광고를 들여다보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상무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컴택 마케팅 팀장인 강혁을 대신해 병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건식은 지난주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만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데이트하고 건식의 원룸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문제는 결혼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내년이면 서른다섯이 되는 여자친구는 건식과의 결혼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건식은 그렇지 않았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혼에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었으나 건식은 결혼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혼자인 게 편했고 결혼과 함께 올 책임과 기대를 짊어지기 싫었다. 결혼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고 가길 몇 차례 되었을 때 건식은 여자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너도 결혼할 사람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 또한 울거나 보채지..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기획 2팀은 주간업무 회의를 한다. 호진은 오늘 회의에서 내년 사업 계획을 확정 짓고자 했다. 여느 회사가 그렇지만 광고 대행사의 사업 계획이란 결국 실적 목표가 다였다. 어느 광고주에게서 얼마의 광고 예산을 따올 것이고, 목표에 부족한 액수를 채우려면 신규 광고주를 어떻게 유치할지 팀원들과 의견을 조율해서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회사가 내려준 비현실적인 목표를 놓고 걱정하고 짜증 내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하고 대책 없는 희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팀의 가장 큰 광고주인 컴택은 한 달 전 애뉴얼 PT가 잘 끝난 덕에 내년 목표도 차질 없을 것으로 한숨 돌렸지만 문제는 연간 30억 광고주인 빅마트였다. 수도권 대도시에서 30여 개의 대형마트..
희철 상무가 본부장실에서 나와 호진의 책상으로 걸어왔다. 다음 주 예정인 신규 광고주 경쟁PT 준비로 계속 새벽에 퇴근한 호진은 멍한 상태로 제안서가 띄워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구 팀장님 열일 하시네” 희철이 보조 의자를 가져와 호진 옆에 앉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뭔가 아직 부족해요.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못 잡겠네” “설마 네가 다 하려고 생각하는거야? 이제 생각만큼 머리 안 굴러가는 나이야. 빠릿한 팀원들 믿고 좀 맡겨봐” 희철의 말이 맞았다. 미덥지 못해 보이던 팀원들이었으나 이번 PT 준비에서 호진이 생각하지 못한 시각에 감탄하는 일이 많았다. 만사 귀찮아 하던 건식이 무슨 바람인지 참신한 인사이트를 제안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획서의 플롯을 마련해 왔을 때 호진은 입..
‘Welcome. 컴택 광고주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무실 입구 옆 모니터에 환영 인사 문구가 잘 떠 있나 호진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폰트가 좀 촌스럽지 않아? 좀 엣지있는 폰트로 바꿀까?” 손병환 차장이 호진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팀장님, 광고주보다는 영어로 클라이언트라고 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손 차장이 알아서 챙겨줘. 난 회의실 점검하러 갈게” 호진은 대회의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경근 과장이 회의실 중앙의 빔 스크린 화면에 띄워진 내년 커뮤니케이션 전략 제안서의 페이지를 넘기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팀의 막내 유진은 테이블 위에 음료수와 다과를 준비하고 있다. 이미 병환이 몇 차례에 걸쳐 잊지 말고 매실 음료로 준비하라고 이야기해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