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블라인드 앱을 깔았다. 직장인 셋 중 둘은 다운받았다는 ‘임금님 귀’ 혹은 ‘화장실 낙서’ 이자, 거친 표현으로는 ‘뒷다마’ 어플이다. 최근 회사가 어수선해지며 블라인드에 이런 저런 말이 돌아다닌다고 들었지만, 호진은 막상 다운받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직 전 직장에서는 호진도 가입했었고, 꽤 열심히 앱을 열었다.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니 어수선하기로 따지자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관적 이야기, 냉소적 다툼, 자포자기 등 올라오는 글들의 정서는 처참했다. ‘음, 난 깔았다가 지웠어. 정신 건강에 좋을게 없더라구’ 호진은 K팀장의 말에 공감했다. 꼼꼼한 업무 능력과 인격까지 갖춘 호진이 존경하는 선배였다. 회사가 어지러워지며 그를 인정해주던 ‘라인’이 없어지고 자신의 위치가 표류하..
이건 꿈이야. 호진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방배동 골목에서 아들 E와 초등학교 셔틀버스를 타러가고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고, 아이의 모습이 3년 전 갓 입학할 때처럼 아기같기 때문이었다. 신발 사이즈가 벌써 호진과 비슷하게 커버렸음에도 꿈에서 아들은 조그만 손을 꼬물거리며 호진을 꼭 잡고 있었다. 꿈이지만 달콤하다, 이대로 깨고 싶지 않다고 호진은 생각했다. 어느틈에 아이의 손을 놓쳐버렸다. 호진은 아이를 찾아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을 뛰어다녔다. 숨이 가빠오며 덜컥 겁이 나는 순간, 눈이 떠졌다.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 침대 옆에서 곤히 자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마음이 놓였다. 현실의 아들은 더 이상 조그맣지 않았다. 어린이에서 소년으로 커가는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어김없이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호진은 갑작스럽게 엉덩이 사이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재택근무 이틀 째, 점심 시간 잠깐이라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 동네 중고서점에 들어선지 채 5분이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든 책이 있고 서가가 존재하는 장소에 들어가면 반드시, 예외없이 호진의 대장은 급격히 활발하게 움직였다. 지금껏 변비를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 기미가 보인다면 어느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어가면 바로 해결될거야. 자신같은 사람들이 있는지 포털에 검색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웃길 것 같아, 시도해본 적은 없었다. 중고 서점의 화장실은 좁았다. 여름인데다 며칠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암모니아 냄새와 지린내가 미묘하게 섞인, 깨끗하지 않은 특유의 내음이 났다. 그 냄새는 호진으로..
“네 실장님” “어, 도시락 시켜주세요. 두명 분으로” 12시가 넘었다. 전략기획실장 H가 인터폰으로 호진과 자신의 식사를 주문했다. 다음 주에 있을 그의 PT자료를 리뷰하다가 점심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 넘게 단 둘이 집무실에 있는 것으로 지친 호진은 밥까지 같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 숨을 쉬었다. 다행히 제안서의 판이 뒤집혀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H 자신이 다른 대기업 오너에게 제휴 사업을 제안하는 PT라서, 이것 저것 세심하게 보며 조정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밥 왔네. 같이 먹으면서 봅시다. 비서가 놓고 간 초밥 세트를 열며 H가 기지개를 켰다. 나무로 된 도시락 위에는 ‘스시조’라는 로고가 박혀 있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조선 호텔의 일식당 이름이었다. 정갈한 초밥에 도미..
“짐이 고작 그게 다예요?” “난 언제나 백팩 하나로 챙길만큼 밖에 짐이 없어. 봐봐, 노트북 거치대도 없이 책 쌓아서 높여 놓았잖아.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늘 단촐하다 못해 휑하던 신팀장의 책상이 이제 정말 텅 비었다. 출입문 밖으로 배웅을 나가던 호진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제 술자리 파할 때 꼭 포옹을 했었기에 그때만큼의 감흥은 아니지만, 그래도 찡하긴 마찬가지였다. 연락 드릴게요, 자주 뵈요. 호진보다 1년 먼저 경력직으로 입사했던 신팀장이 떠났다. 호진의 옆 팀인 고객 정보팀장이었던 그는 지난 5년 간 호진의 동료이자 스승이었고, 마음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형이었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호진은 그를 경계했다. 첫 회의에서 신 팀장의 발표 화면을 보..
‘당신은 팀장으로서 자격이 있는가’ 물어온다면, 호진은 자신이 없었다. 팀장 역할 한지 이제 4년 여가 되어 가지만, 신입 시절 생각했던 팀장의 역할과 지금 자신은 사뭇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 아이같았기에 그의 눈에 비친 팀장은 모든 걸 알고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과 인사이트로 고민을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거침없이 해결해주는 구세주같은 어른이었다. 이제는 안다. 팀장도 임원의 눈치를 봐야하는 또 한 명의 직장인일 뿐이고, 가끔은 기발하다 못해 발칙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팀원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후배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인지, 정말 잘못한 점을 고쳐주기 위한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아래 ..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호진은 깨어 있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고민하던 그는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오늘을 기분좋게 보내려면 이겨내야 해. 안하면 하루 종일 내가 싫어질거야. 호진은 6시부터 문을 여는 실내 골프 연습장으로 향했다. “어, 이 사람! 왜 이렇게 위험하게 치는거야! 에이 쯧”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른데도 아니고 손에 맞았잖아요!” 어제 아침 연습장 뒷 타석에 있던 아저씨에게 혼났다. 호진이 5번 클럽으로 휘두른 공이 평소와 다르게 잘 맞지 않았다. 잔뜩 집중해서 칠수록 공은 오른쪽으로 튀고 왼쪽으로 튀었다. 그러길 몇 차례, 결국은 사단이 났다. 왼쪽으로 크게 휘어 나간 공이 스크린을 맞고 튕겨나가 거기있던 사람에게 맞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전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당연히 가야지, 이 등신아" 대학 동문이라 늘 편하게 대하는 L상무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고 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가는 쪽으로 기울던 호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이직이었다. 호진이 속해있는 온라인 사업부가 통째로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 이동하는 것으로 윗선에서 결정됐다. 필요한 행정 절차를 거쳐 다음 달 1일부터는 호진을 포함한 사업부의 모든 인원이 회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각 계열사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온라인 사업을 전문 회사로 한데모아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었다. 다만 일대일 면담을 통해 옮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사람은 남을 수 있다는 인사팀의 안내가 있었다. 고민할 시간은 약 2주가 주어..
일주일에 두세 번 호진을 찾아오는 회사 후배 K의 레파토리는 항상 똑같다. “내려가서 음료수 하나 사주세요.” 185cm 정도 키에 시원한 이목구비, 한달 전 이례적으로 30대 후반에 팀장이 된 요즘 회사의 ‘라이징 스타’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서로 많은 말을 섞지 않아도 호감이 가는 사람. K에게는 호진이 그랬고, K도 호진의 인상이 좋게 남아 있었다. 완구 카테고리를 담당하는 그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된 것은 이전 팀장 J의 급작스런 퇴사 때문이기도 했다. J와 호진은 경력사원 입사 동기였고, 동갑인 둘은 금새 경력직으로서의 속내를 서로 터놓는 친구 사이가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K 또한 J를 팀장이 아닌 마음으로 따르는 형님으로 생각했고, 꽤나 잘 지냈던 모양이다. 호진..
“오늘은 연차 쓰시고 오신 건가요?” 4명의 면접자 모두가 그렇다고 답했다. 설사 아니더라도, 재택 근무 중에 잠깐 나왔거나 혹은 외근 나간다 하고 면접을 보러 왔더라도 ‘하루 연차를 썼다’라고 하는 것이 암묵적인 정답임을 호진도 잘 알고 있다. 자신도 예전에 똑같이 말했으니까. 지금의 회사에서 ‘조그만 거짓말’을 하고 면접을 보러 나왔다는 것은, 여기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줘야하는 면접에서는 금기되는 말이다. 사람을 좋게 평가할 면을 찾는 것보다, 안좋은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다. 첫 면접자 A는 마치 신입사원 면접에 온 것처럼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앳된 얼굴에 아직 경력도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호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