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에 한 번은 물을 갈아줘야 한다. 그래야 핏물이 잘 빠진다. 수입산 갈비일수록 잡내를 없애려면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은 필요했다. 붉은 핏기운이 없어질 때까지,고깃살이 하얀색으로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잡내를 빼는 또 하나의 비결은 앙념장에 있다. 배를 최대한 많이 강판에 갈아서 넣어준다. 생강 또한 적당한 양이라고 생각되는 것보다 두 배 정도 갈아서 넣는 것이 좋다. 진한 생강향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갈비가 끓어갈 때 소고기의 잡내를 생강이 가득 끌어안고 날아가주기 때문이다. 호진이 세 번째 갈비찜을 하면서 익히게 된 나름의 조리 비결이었다. ‘문성실의 레시피’를 기본으로 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처음 시도했을 때는 조금 짜게 됐었다. 레시피의 양념장은 고기 800g 기..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 걸어가면서 호진은 속이 또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1호선 역사 특유의 고린내같은 냄새가 지난 밤의 숙취를 끄집어 내고 있었다. 아무리 금요일 밤이었다고 해도 어제 너무 마셨어. 아우, 오늘 스터디에서 제대로 앉아 있을수나 있을까. 20대 후반이었던 호진은 열심히 놀았다. 매번 다음날 스터디에 영향이 있을거라고 걱정하면서도 금요일이면 늘 달리곤 했다. 오늘 아침 스터디로 가는 길은 유난히 힘들었다. 종각역에 있는 건물에서 토요일 아침 10시마다 모인지 벌써 이년 째가 넘어가고 있었다. 브랜드 원서를 매주 한 챕터씩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가끔은 주제에 맞는 케이스 스터디를 하며 토론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마케팅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제안 잘 들었습니다. 질문이 몇 가지 있는데요, 혹시 스타트업을 클라이언트로 일해본 경험이 있나요?” 화상회의 모니터의 얼굴들에 약간 당혹한 표정이 스쳤다. “자기 돈 넣고 광고하는 스타트업 사람들은, 퍼포먼스 광고에서 어떤 지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새로 교체한 광고 대행사의 제안을 받고 호진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예상했던대로 답은 두리뭉실했다. “어느 한 지표를 콕 집기는 어렵네요. UV를 보는 경우도 있고, ROAS에 민감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 요즘은 회원 숫자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게 트렌드이긴 하구요…” 호진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디지털 마케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근에 지인들의 스타트업을 도우며 그들이 광고 등 마케팅 하는 것을 보며 배운 것이 있습니다. 돈..
호진의 기억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가장 행복한 색으로 기억된 날은 중학교 2학년 봄, 어느 토요일 오후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방에 누워 있으면 창을 통해 따스한 봄햇살이 들어왔다. 마당의 아카시아 꽃 향기가 살며시 그 안에 포개져 반짝였다. 숙제는 내일 해도 되는, 아무런 부담없는 토요일이다. 조금 이따가 친구들과 고속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풍경과 늘 함께 귓가에 울리는 것은 일본 노래였다. 지금도 듣고 있는 노리유키 마키하라, 안전지대 등의 노래는 그때의 풍경을 그대로 눈앞에 펼쳐주곤 했다. 여느 중학생이 그랬듯,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 외에 다른 목표를 가지지 못하던 호진에게 일본은 ‘어른이 되면 누리게 될’ 멋진 신세계였다. 고속터미널 지하 상가에 있던 ‘일본노래 빽판 가게’..
91년 방배동의 한 중학교 교실, 쉬는 시간이었다. A와 B가 씩씩거리며 호진에게 다가왔다. “야, 소방서하고 우범 지대, 둘 중에 뭐가 더 촌스럽냐?” 이해를 못했다. 둘 중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호진의 질문에 답하는 듯, 둘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Fire House(소방서)는 안전을 지키는 곳이잖아. Skid Row(우범 지대)가 뭐냐? 구질구질하게” “록 스피릿을 모르는 너 같은 애한테 무슨 말을 더 하냐. 빈민층의 울분을 담은거잖아” “하, 그러면서 죄다 사랑 노래잖아. 솔직히 세바스찬 바흐 얼굴 말고 뭐가 있냐, 스키드 로우가” “사랑 노래, 웃기고 있네. 파이어 하우스야 말로 록이 아니라 팝이지. 이름도 촌스러워서” 서로 좋아하는 밴드 중 누가 더 낫냐의 ..
“What about Smiley?” (스마일리는요?) “He’s leaving with me” (나와 같이 그만두는 거야) 순간 표정이 흔들린다. 조지 스마일리 자신도 처음듣는 은퇴 소식이다. 1960년대 영국 첩보국 ‘서커스’의 리더 ‘컨트롤’은 실패한 스파이 작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했다. 내심 반기는 듯한 고위층의 질문에 그는 자신의 오른팔인 스마일리도 함께 그만둔다고 깜짝 발언을 했다. 남게된 자들의 환호하는 마음이 회의실에 떠돈다. 스마일리는 그 작전에 관여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한마디 항변도 없이 자신의 상관과 함께 평생을 바친 조직을 떠났다. 희끗해진 머리의 늙은 스파이, 최고 수뇌부까지 올라간 베테랑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담백했다. 이토록 간단하게 조직의 사다리에서 손을 놓..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나 영상 중 하나만 고른다면, 호진은 ‘참새가 옥수수 알갱이를 쪼아먹는 영상’을 택할 것이다.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와 아들의 목소리는 담겨 있을지 모른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평일이었다. 날씨 탓인지 롯데월드 매직 아일랜드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들이 옥수수 버터구이를 먹고 싶다고 해서 우산을 쓰고 나왔다. 비를 피해 자리잡은 ‘사과나무’ (정식 명칭은 ‘회전 그네'였으나 호진과 아들은 이렇게 불렀다) 옆 조그마한 전망대 아치 아래에는 참새들이 모여 있었다. 아들은 옥수수 조각을 떼어내 살며시 던져주었다. 빗방울 소리만 나즈막한 가운데 새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참새는 정말 ‘짹짹’하고 울었다. 그 장면이 신기해서, 별 생각없이 동영상을 찍어 놨을 뿐이다. 오늘 구글 ..
“디페시 모드 듣고 있었나봐요” 호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소개팅 상대가 자리에 앉은지 몇 분 안되어 꺼낸 말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듣고 있던 MP3 플레이어에 곡 이름이 띄워진 채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전성기를 한참 지난, 그렇게 대중적이지도 않은 신스팝 밴드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로수길에서 만난 소개팅 상대여서 그 사실이 더 신선했다. 얼굴이 다시 보였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 여자의 그때 표정을 호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호진은 그 날의 그녀가 보여준 모습과 표정을 거의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비가 보드랍게 내리던 초겨울이었다. 그리 춥지않던 날씨에 옷차림은 계절에 비해 가벼웠다. 검은 색 스키니한 바지에 검은색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머..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아들이 친구 생일 파티에 엄마와 함께 초대받은 토요일 오후였다. 예상치 못한 반나절 휴가를 얻은 호진은 20대 추억이 깃든 거리를 오랜만에 찾았다. 어제 TV 프로그램이 이끌어낸 아련한 기억 때문이었다. 10여년 전 녹화된 어느 모던록 밴드의 출연 영상이 그 때 여름의 냄새와 소리, 사람들을 불러왔다. 호진 자신이 홍대의 일원인 듯 주말 밤마다 골목을 쏘다니고, 취하고, 춤추던 그 때를 떠올린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건물이 새로 올라간 것 같았다. 역 입구에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는 잊었지만 풍경은 시간이 흘러간만큼 변했다. 토요일 저녁이면 약속 상대를 기다리던 사람들로 웅성이고, 담배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던 모습은 없어졌다. 하지만 한껏 차려입은 젊은..
노트북 모니터에 55명의 얼굴이 모자이크 형태로 비춰지고 있었다. 왼쪽 가장 위 박스에서 강사가 활발한 손동작으로 참여자들을 환영했다. 밝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나의 에너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주제에 어울리는 강사를 섭외한 것으로 보였다. 호진은 재택 근무로 온라인 강의를 들을 예정이다. 새로 옮긴 회사는 온라인 전문 기업답게 고성능 노트북을 지급했으며, 슬랙과 줌을 적극 활용하는 등 재택근무 인프라는 훌륭했다. 첫 날은 노트북 세팅과 외부망 접속 설정에 끙끙대며 하루를 보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며칠 사용하다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훌륭했다. 회의실에 모두 모여 한 사람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하는 이전의 광경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상은 착실히 진화해 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