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기획 2팀은 주간업무 회의를 한다. 호진은 오늘 회의에서 내년 사업 계획을 확정 짓고자 했다. 여느 회사가 그렇지만 광고 대행사의 사업 계획이란 결국 실적 목표가 다였다. 어느 광고주에게서 얼마의 광고 예산을 따올 것이고, 목표에 부족한 액수를 채우려면 신규 광고주를 어떻게 유치할지 팀원들과 의견을 조율해서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회사가 내려준 비현실적인 목표를 놓고 걱정하고 짜증 내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하고 대책 없는 희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팀의 가장 큰 광고주인 컴택은 한 달 전 애뉴얼 PT가 잘 끝난 덕에 내년 목표도 차질 없을 것으로 한숨 돌렸지만 문제는 연간 30억 광고주인 빅마트였다. 수도권 대도시에서 30여 개의 대형마트..
토요일 오후 카페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호진이 들어갔을 때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커플이 마침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호진은 의자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아내가 요즘 저기압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오늘 아침에 아내는 또 한 번 폭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집에 같이 있다가는 자기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아 서둘러 도망쳐 나온 길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남은 아들은 방에 갇혀 밀린 숙제를 하며 눈치 볼 것이 뻔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집에 있으면 오히려 아내의 화를 돋울 것 같았다.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아내의 독기 서린 표정만 눈앞에 그려질 뿐 왜 그런지 헤아릴 수 없었다. 호진은 작게 한숨 쉬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연결했다. 거의 십 년째 쓰고..
“이상하네. 왜 서로 따로 다녀요? 아까는 작은 아저씨 혼자 만나러 오더니”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현준은 앨리스의 얼굴을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아까 기타! 작은 아저씨? 재경이 형? 만났어요? 어디서? 형 지금 어디 있어요?” 단어를 더듬대다가 질문을 쏟아내는 현준에게 앨리스는 안경 너머 투명한 눈빛으로 답했다. “사지요. 사지로 간다고 해서 알려줬어요” 시디 가게로 내려오자마자 재경은 앨리스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야. 이 사람은 거기를 알겠지. 재경에게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헤드폰을 걸치고 걸어가는 앨리스가 보였다. 저기요. 재경은 숨을 뱉어내며 앨리스를 세웠다. 마치 다시 올 것을 알았다는 듯 재경을 향한 그녀의 ..
“왠지 우리 고등학교 때 여자애들 같지 않아?” 볼수록 그 시절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고 현준이 말했다.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다. 하얀색 게스 천 가방 있잖아. 그거 메고 있으면 완전 딱이겠는데” 순간 앨리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현준과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걸어온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기타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요. 이거 사실래요? 십오만 원에 내놓은 건데, 십사에 드릴게요” ”텄어요. 약속 시간 십 분 지나 못 오겠다고 메시지 왔네요. 참 나” 거래는 어떻게 됐냐는 현준의 질문에 앨리스가 말했다. 일이 재밌게 되어간다는 생각에 현준이 말할 거리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럽시다. 안 깎아줘도 돼요. 십오만 원에 살게요” 재경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
당뇨 환자에겐 더운 날씨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추석을 앞둔 주말이었으나 지하철역 밖으로 나오자 한여름처럼 후끈했다. 거의 십 년 만의 홍대 입구였다. 풍경은 시간이 흐른 만큼 변했다. 출구 앞에서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은 사라졌으나 한껏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무리 지어 움직이는 모습만은 여전했다. 스냅 백이라도 쓰고 올걸. 아저씨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괜히 재경이 형하고 여기 오자고 했나. 며칠 전의 약속이 후회됐다. 형 힘들 거 같으면 다음에 보자고 메신저를 보냈다. 막 전철 탔어. 벌써 도착한 거? 답장이 바로 왔다. “농담치곤 심한데.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냐? 일주일마다 두 번 투석 받는 사람 앞에서?” 재경은 주사 흔적으로 부어있는 팔뚝을 현준에게 내밀었다...
희철 상무가 본부장실에서 나와 호진의 책상으로 걸어왔다. 다음 주 예정인 신규 광고주 경쟁PT 준비로 계속 새벽에 퇴근한 호진은 멍한 상태로 제안서가 띄워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구 팀장님 열일 하시네” 희철이 보조 의자를 가져와 호진 옆에 앉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뭔가 아직 부족해요.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못 잡겠네” “설마 네가 다 하려고 생각하는거야? 이제 생각만큼 머리 안 굴러가는 나이야. 빠릿한 팀원들 믿고 좀 맡겨봐” 희철의 말이 맞았다. 미덥지 못해 보이던 팀원들이었으나 이번 PT 준비에서 호진이 생각하지 못한 시각에 감탄하는 일이 많았다. 만사 귀찮아 하던 건식이 무슨 바람인지 참신한 인사이트를 제안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획서의 플롯을 마련해 왔을 때 호진은 입..
’30분 정도 늦겠다 미안’ 판교 역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호진의 휴대폰 화면에 장호황이 보낸 메신저가 떴다. 시계를 보니 저녁 여섯 시 십분 전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건 매번 있는 일이기에 호진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광고주 외근을 일찍 마치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온 것은 자신이었다. 그 동안 뭐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메시지 알림이 또 울렸다. ‘내리면 바로 백화점이니 거기서 놀고 있어’ 말 그대로 지하철 역 출구가 바로 백화점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느 백화점보다 훨씬 더 화려한 출입문 앞에 선 호진은 오픈할 당시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기사가 기억났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수와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평일 저녁이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호진은 백화점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하..
‘Welcome. 컴택 광고주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무실 입구 옆 모니터에 환영 인사 문구가 잘 떠 있나 호진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폰트가 좀 촌스럽지 않아? 좀 엣지있는 폰트로 바꿀까?” 손병환 차장이 호진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팀장님, 광고주보다는 영어로 클라이언트라고 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손 차장이 알아서 챙겨줘. 난 회의실 점검하러 갈게” 호진은 대회의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경근 과장이 회의실 중앙의 빔 스크린 화면에 띄워진 내년 커뮤니케이션 전략 제안서의 페이지를 넘기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팀의 막내 유진은 테이블 위에 음료수와 다과를 준비하고 있다. 이미 병환이 몇 차례에 걸쳐 잊지 말고 매실 음료로 준비하라고 이야기해 놓..
우산을 털고 계단을 내려갔다. 폐점 한 시간 전, 서점은 비 때문인지 한산했다. 호진이 예상한 대로였다. 이 시간의 풍경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드문드문하고, 챙겨 온 중고책을 팔려고 늘어선 줄은 없었다. 직원들의 얼굴엔 하루 일과의 피곤이 누적되어 있으나, 이제 또 하루 넘겼다는 안도감이 편안하게 걸쳐 있었다. 공간을 느슨하게 채우는 노곤함과 적막함에 호진 또한 느긋해질 수 있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진 않았다. 만화책 서가와 동화책이 있는 곳에는 한두 명 정도 있었다. 어린이 서적 코너에서 종이에 적어온 리스트를 유심히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책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은 대개 엄마들이었다. 학교에서 준비해오라고 한 ‘학년별 권장도서'를 찾고 있을 것이다. 호진 역시 아들이 저학년일 때 몇 년 간 했던 일이기..
사당역 사거리에서 567번 버스를 탔다. 롯데리아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타면 강남쪽으로 갔다. 호진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지나 반포를 거쳐, 신사동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30분 조금 넘게 걸려 도산 사거리 정류장에 내리면 씨네하우스 극장이 있었다. 호진은 고3이었고 수능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주말 저녁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늘을 위해 이번 주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꼭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다. 1995년 9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중경삼림이 개봉하는 날이었다. 씨네하우스 지하 1층에는 큰 대기실이 있었다. 간식거리를 파는 매장들이 둘러싸고 있는 푸드 코트같은 구조였다. 그렇게 붐비는 극장은 아니었다. 개봉 시간보다 여유있게 도착한 호진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소리에 놀랐다.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