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록 번호를 입력하기 전에 벨을 누른다. 아내와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집 앞에 왔다는 걸, 곧 들어간다는 걸 벨소리로 알린다. 그러면 서로 마주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할 말은 뻔했다. 왔어? 응. 밥은? 내가 대충 챙겨 먹을게. 누가 먼저 왔느냐에 따라 묻고 답하는 순서만 다를 뿐이다. 마주하고 식탁에 앉지 않는다. 거실에 햇빛이 들어오는 날에는 TV 위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곧 서로의 방은 닫히고 각자의 밤을 보낸다. 나는 방에서 강의 준비를 하거나 학생들의 리포트를 채점한다. 브랜드 수업을 주로 맡아서인지 새로운 사례가 많다. 불과 몇 년 전에 잘나가던 스타트업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정말이지 피곤한 전공을 골랐어. 옛날 교수들은 한 교재로 십 년도..
스팅 애드 임원 회의가 끝난 후 희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한보경 상무가 다가왔다. “장 상무, 차 한잔하자” “그럴까요? 바로 선배 방으로 가시죠” 비서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며 분위기를 잡아가는 보경답지 않았다. 희철보다 2년 선배인 보경은 전략가보다는 영업맨에 가까웠다. 늘 허허 웃고 다니며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는 편인 그는 임원 진급은 희철보다 늦었지만 탄탄한 광고주 라인업을 갖춘 기획 2부문장을 맡고 있었다. 둘의 스타일이 달라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는 사이였다. “너 얘기 들었지?” 보경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희철은 무슨 일인지 짐작..
“아니 요즘도 SWOT 분석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어요?” 호진은 전화기 넘어 강혁의 하소연을 한참 듣다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이미 추진하기로 결정한 일을 그 자식이 계속 반대하니, 참 미치겠다니까. 구 팀장이 우리 좀 도와줘” 컴택 사업전략팀장과의 미팅에 참석해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강혁의 요청이었다. 엄밀하게는 광고 관련된 일이 아니었기에 굳이 같은 회사도 아닌 호진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광고주 내부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잘 못하면 광고 대행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강혁과의 통화 후에도 쉽게 판단이 서지 않은 호진은 희철을 찾아갔다. “애매하긴 하네. 가만, 사업전략팀장이면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긴 하다” “어떤 사람인데요?” “뭐라고 해야 하나. 만만치 않아. 좀 재수는 없지..
#끓고 있는 순댓국이 식기를 기다리며 첫 소주는 흰쌀밥과 마신다 짐은 얼추 다 꾸렸다. 내일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챙길 것은 휴대폰 충전 케이블과 면도기 등 몇 개 되지 않았다. 잊지 않도록 포스트잇에 메모해 놓은 호진은 시장감을 느꼈다.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생각하니 근처에 자주 가던 곳이라도 한 군데 들리는 게 좋겠다 싶었다. 몇 군데를 떠올리다 길 건너 순댓국집의 커다란 가마솥에서 생각이 멈췄다. 24시간 뼈를 계속 끓여댔기에 가게에 가득 찬 비릿한 뼈 냄새가 코 끝에 맴돌자 호진의 허기, 아니 술 생각은 어느 때보다 한층 강해졌다. 갓 지은 흰쌀밥은 왜 이다지도 단맛이 나는 걸까. 빈속에 들어간 소주의 칼칼한 목 넘김을 따끈하고 보드라운 쌀밥의 질감이 감싸 안았다. 호진은 긴장이 조금은 ..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호진은 예전에 한 번, 같은 감정을 가졌던 적을 떠올리려 했다. 언제였는지 바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파트와 건물이 보이는 서울 시내를 지날 때까지 몰랐다가 경기도로 접어들어 풍경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야 기억났다.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왔던 때,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서의 막막함과 서글픔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며칠간 같이 있다가 돌아가는 아들이 서운해서인지 엄마는 음식을 잔뜩 했다. 밥상에 호진이 좋아하는 반찬이 가득했지만 몇 술 뜨지 못했다. 군 생활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대 앞까지 아버지가 운전해 주셨다. (호진을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에 5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진저리를 친 아버지는 다시는 데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호진은 방으로 ..
“여어, 여기야” 저녁 시간의 식당은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경근을 먼저 발견하고 안정호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경근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다섯 시에 광고주 연락 서 일을 시키는 바람에” “하하. 광고쟁이 숙명이지 뭐. 어디 애들이? 컴택?” 정호가 경근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경근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잔을 받았다. “아니요. 팀장님 나가시고 신규 영업한 데가 하나 있어요. 이제 막 투자 기 시작한 스타트업인데, 그쪽이 맨날 밤새 일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네요. 그나저나 어떠세요? 광고주 가니까 삶의 질이 높아지셨나요?” 경근과 잔을 부딪히며 말도 마라는 듯 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는 와 보니까 영업 판이야. 광..
유진은 어제 잠을 설쳤다. 어떻게 첫인사를 할지, 광고주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지 고민하다 보니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광고주로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 온 미팅 상황을 상상하는 유진은 설레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처음으로 혼자 광고주 미팅을 하러 가는 날이다. 이제 입사 이년 차, 어엿한 광고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전 이제 과장입니다. 하하. 그럼요. 시간이 꽤 지났지 않았습니까” 오경근 과장이 꽤 오랜 통화를 마친 후 바로 구호진 팀장 자리로 바로 갔다. 둘 사이의 대화가 오간 후 호진이 유진을 불렀다. 호진 책상 옆 보조 의자에 앉은 유진은 호진이 하는 말에 잠시 얼떨떨했다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진이도 이제 혼자 케어하는..
“야. 이름값 좀 해라. 이름은 무슨 무협지 주인공 같은 놈이 그렇게 소심해서야. 쯧” “송구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컴택 마케팅팀 강혁 팀장이 오쌍진 상무 앞에서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쌍진은 방금 회의에서의 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왜 재무부문 애들이 딴지 걸어올 때 한 마디도 못해? 걔들이 어이구 그러세요, 돈 쓰고 싶은 만큼 쓰셔야죠, 하는 애들이냐? 싸워서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도 스마트폰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데 전년 대비 광고판촉비 130% 증액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야 이 등신아! 네가 짠 예산 아니야?” 쌍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고 강혁은 그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맞잡은 두 손을 꽉 쥐며 고개..
손병환 차장은 오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오십 번 정도 했는데, 평소보다 두 배 많았다. 컴택의 신규 스마트폰 광고 최종 시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미 두 차례 시사를 마쳤고, 대표 이사까지 컨펌이 된 광고였다. 카피 폰트 등 몇 가지 미세한 편집만 남은 상황이어서 실무들끼리만 보기로 했고, 호진은 참석하지 않았다. 팀의 최선임인 손병환 차장과 정유진 사원만 컴택을 방문했다. “이거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나?”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오쌍진 상무가 예기치 않게 회의실로 들어왔고 다시, 다시를 3번 연속하여 광고를 들여다보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상무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컴택 마케팅 팀장인 강혁을 대신해 병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건식은 지난주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만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데이트하고 건식의 원룸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문제는 결혼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내년이면 서른다섯이 되는 여자친구는 건식과의 결혼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건식은 그렇지 않았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혼에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었으나 건식은 결혼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혼자인 게 편했고 결혼과 함께 올 책임과 기대를 짊어지기 싫었다. 결혼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고 가길 몇 차례 되었을 때 건식은 여자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너도 결혼할 사람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 또한 울거나 보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