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매장 사무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강한나는 지금의 적막이 어색했다. 부점장으로서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늘 말을 건넬 점장이 있었다. 이제는 그 책상에 자신이 앉아 있다. 노트북을 열어 최근 매출 현황을 점검하고 메일을 확인해 봐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여기서 할 일은 없었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매장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유영빈이 이래서 계속 사무실 밖에 있었나 보네. 불편해서 못 있겠어’ 이른 평일 오전이라 손님은 드물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한나에게는 매장의 풍경과 직원들의 모습이 예전과는 어딘가 달리 보였다. 예전에는 매장 곳곳에 잘못된 곳이 없는가를 매서운 눈초리로 살펴보곤 했다. 오늘은 직원 중 누가 힘들어 보이는 사..
카페 토라세 방배점 아침 조회 시간. 사무실 중앙에서 유영빈이 나란히 옆에 선 강한나를 보며 말했다. “점장님, 조회 시작할까요” 영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한나가 목을 가다듬고는 맞은편의 매장 직원들을 한 번 둘러봤다. “오늘부터 방배점 점장으로 일하게 된 강한나입니다. 잘 부탁, 아. 부끄럽네요” 한나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쑥스러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직원 중 누군가 ‘강한나 점장님, 축하합니다’라며 시작한 박수에 모두가 함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어제 늦은 오후에 조직개편 발령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유영빈 점장의 본사 복귀는 이미 알고 있던 만큼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다. 매장 직원들을 술렁이게 만든 것은 두 건의 발령이었다. 강한나 과장 – 명) 방배점 점장 서한준 사원 –..
음식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갑지만 상쾌한 겨울바람이 영빈의 몸을 한차례 휘감았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소박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영빈은 가게 맞은편의 담벼락 쪽으로 걸어가며 담뱃불을 붙였다. 빈속에 계속 들이킨 술 때문에 정신은 몽롱했으나 오히려 속은 가벼웠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자 희미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자신의 입김과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닿는 작은 눈송이의 느낌이 청량했다. 유흥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골목 초입에 위치한 음식점이라 주변은 조용했다.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가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해온 방배점 가족들이다. 함께 켜켜이 추억을 쌓아온 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영빈은 다시 한번 쓸..
“그리고, 여러분께 알려야 할 내용이 있어요” 월요일 아침 조회가 끝나기 전, 유영빈 점장이 말끝을 흐렸다. 직원들은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숨죽인 채 기다렸다. 사무실 천장 쪽을 바라보던 영빈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다들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겠지만, 이번 주까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게 됐네요. 다음 주면 전 본사로 돌아갑니다” 역시 소문이 맞구나. 몇 직원들의 작은 탄식이 있었을 뿐 반응은 대체로 조용했다. 며칠 뒤면 정식으로 조직개편 발령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영빈이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며 작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 외친 ‘수고하셨습니다!’와 함께 박수가 시작되려 할 때 영빈이 잠깐,이라며 두 손을 저었다. “아직 한 가지 더 남았어요” “이제 민..
“점장님 오늘도 자리 비워?” “요즘 하루 걸러 하루는 본사로 가잖아. 그 소문이 진짜인가 보다” 강한나 매니저가 진행한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사무실에서 나와 매장으로 돌아가는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영빈 점장이 지난 주부터 부쩍 자주 본사에 가면서부터 ‘곧 점장이 바뀐다’라는 이야기가 직원들 사이에 공공연한 사실처럼 오르내리고 있다. 한나도 요즘 매장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빈에게 싫은 소리를 하진 않았다. 본사에서는 아직 복귀 발령도 나지 않은 영빈을 마치 신사업 프로젝트에 이미 투입된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원래 회사란 게 그랬다. 위에서 힘을 실어준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문화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조직에서 관심..
그새 많이 변했네. 영빈은 오랜만에 찾은 본사 마케팅부문 회의실이 영 어색했다.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던 빔 프로젝터는 천장 부착형으로 바뀌었고, 회의 때면 보드마카 펜으로 무언가를 적곤 하던 화이트보드 대신 한쪽 벽면이 판서 가능한 반투명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지난 회의의 흔적인 듯 고객 분석 데이터와 타깃 인사이트 등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영빈은 빈 회의실에서 홀로 앉아 벽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옛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윤수 팀장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이십여 분 정도 지난 후였다. “영빈아, 내가 불러놓고 늦어서 미안하다. 앞 회의가 생각보다 늦어졌네” “아니에요. 무슨 회의였는데요?” “뭐겠냐. 이맘때면 늘 하는 내년 사업전략 회의지. 전략 애들은 어차피 마지막에 지들 맘대로 할..
“생각보다 빨리 떠나게 되어서 아쉽네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한유리 과장이 카페 토라세 방배점 직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자 모두가 손뼉을 쳤다. 본사에서 잠시 스쳐지나 가는 낙하산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예쁜 얼굴로 뺀질거릴 거라 여겼던 그녀가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진심으로 방배점 식구들과 어울리려 했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과장님, 보고 싶을 거예요, 자주 놀러 오세요” “하긴 점장님 보러 오시겠구나, 하하” 남자 직원들이 큰소리로 한유리의 인사에 화답했다. 넉살 좋은 농담에 매장 사무실에 모인 모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리 과장님하고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강한나가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한유리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한나 역시 유리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벚꽃..
“그 선생님이 나한테 처음으로 해줬던 말,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매니저님이 똑같이 했다니까요” 한준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응차, 하는 소리와 함께 팔에 힘을 실어 한나를 위로 들쳐 업었다. 몸이 출렁하는 기분에 한나는 다시 한번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렇지만 날 계속 믿어보려 애쓴다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줬는지 몰라요. 지금까지 날 지탱하게 해줬다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다시는 그분을 못 봤어요. 학교 다시 갈 용기도 없었고요” “그 선생님이, 나하고 닮았다는 거예요?” 한나가 몇 번을 주저한 후에 말했다. 한준이 웃는 듯 몸이 조금 흔들렸다. “네. 하지만 매니저님만큼 사납지는 않..
곳곳에서 망치로 못 두드리는 소리와 철을 자르는 듯한 전기톱 소리가 들려왔다. 재즈 페스티벌 팝업 매장은 가장 큰 규모의 메인 스테이지와 중형 무대를 오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흙으로 된 바닥 위에 나무판으로 된 지지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몇 군데 기둥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인부들이 쉬는 시간인지 공사 현장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있는 이 동선이 제일 붐빌 듯한데요. 매장 규모도 지난 벚꽃 때보다 두 배 정도 되고요” 한준이 주위를 유심히 살펴본 후 말했다. “잘 아네요? 한준 씨 여기 처음 와보는 게 아닌가 보네” “지난 몇 년 동안 페스티벌 취소되었을 때 빼고는 매번 왔어요. 재즈 좋아해서요” 한나는 그의 계속되는 의외의 모습에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머리 좋은 것만 믿고 까불..
대회의실에 조명이 다시 켜지고 임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 근처 자리에서 노트북을 정리하고 있는 한유리에게 몇 명이 회의실에서 나가기 전에 덕담을 건넸다. “오늘 발표 좋았어요. 까다로운 대표님이 한 번에 오케이 하시다니. 허허” “디자인 부문도 어려운 고개 넘었네. 매장 리뉴얼 프로젝트가 승인됐으니, 한유리 과장 한 건 올렸어” 옅은 미소로 감사를 표시한 한유리를 대신해 디자인 부문장이 얼굴에 잔주름이 잡힐 정도로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럼, 이 프로젝트 때문에 한 과장이 일부러 현장 나가서 몇 달 동안 고생한 결과인데. 우리 디자인 에이스잖아요” 회의실을 나와 디자인팀으로 이동하는 중에 부문장이 유리에게 말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본사로 돌아오는 걸로 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