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는 몸을 최대한 왼쪽으로 기울였다. 서한준은 오른 편에 앉아 골똘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한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단발머리를 뒤로 꽁지 묶고 양쪽 귀에는 잔뜩 피어싱을 한, 꽤나 놀 것처럼 보이는 이 밉상인 녀석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코노미야키랑 참치 타다키, 괜찮으세요?” 한나가 대답 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한준은 “그럼, 이렇게 할게요”라고 스스로 답했다. “아 그리고, 술은 하이볼로 한 잔씩 주세요” 혼자 알아서 주문을 마친 한준은 한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한나는 이 녀석을 한 대 쥐어 패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준이 한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가로수길의 조그만 이자카야였다. 모든 좌석이 바 형태로 되어 있어 나란히 앉을 수밖..
“오늘도 절반 정도는 버려질 거예요” 서한준의 말에 서류를 훑어보던 강한나 매니저가 뿔테안경을 오른손으로 올려 쓰며 그를 쳐다봤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거, 듣기 안 좋은데” “사실을 말한 건데요” 한준의 답에 한나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요? 이게 다 매장 실적하고 연관되어 있는데” 한준이 한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매니저님이 물어봐주길 기다렸어요” 한준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챘다. 한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걸. 굳게 쌓아 올린 장벽 안에 숨어있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 한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무릎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아이가 계속 보였다. 처음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우연히 같은 종족을 만난 반..
“후회 없는 거죠?” “없습니다” 카페 토라세 방배점 사무실, 유영빈 점장과 강한나 매니저의 표정이 굳어 있다. “앞으로 번복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이게 제 선택입니다” 한나가 사무실에서 나간 후 영빈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설마 하긴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영빈은 바로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어, 점장님. 그래, 면담은 마치셨나요?” “그래. 면담 결과는…” 본사 인사팀 동기인 정지호가 영빈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이미 예상하고 인사 발령지 다 고쳐 놨는데. 너랑 전화하고 나서 바로 결재받으러 가면 돼” “그래. 강한나 과장은 본사 복귀 대신, 방배점 매니저로 남습니다” 영빈은 졌다는 표정으로 방금 마친 면담 결과를 인사팀에 확정 지었다. “그런데 용케 윗선..
잠시 후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음식점으로 들어왔다. 그중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남자가 예약석에 밑반찬을 올리고 있는 만호를 보고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와. 오늘은 만호가 있구나. 운 좋았네” “그렇죠? 과장님은 만호가 만든 제육볶음 좋아하시잖아요? 벌써 준비해 놨다고요. 하하” 쑥스러운 얼굴로 작게 고개만 끄덕여 인사한 만호를 대신해서 예지가 큰 소리로 손님들을 반겼다. “정말이야. 사장님도 음식 잘 하시지만, 이 집 아들의 손맛에는 뭐랄까. 그리운 느낌이 있단 말이지” 과장이라 불린 남자는 기대된다는 듯 두 손바닥을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럼 새로 우리 회기 동사무소의 새 식구를 환영하며, 건배!” 왁자지껄하게 술잔이 돌기 시작한 테이블의 음식 준비를 마친 만호가 다시 민주의 앞자리로 ..
오후 시간이 금세 지났다. 만호는 디지털 랩에서의 오늘 하루가 진심으로 즐거웠다. 종일 민주와 함께 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풍부하게 갖춰진 원재료로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처음 요리를 배웠을 때의 즐거움이 오랜만에 기억났다. “진심이야. 만호 씨 자주 와요” 전도일 셰프는 만호가 꽤 마음에 들은 듯 말끝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만호와 민주가 감사의 인사와 함께 디저트 랩을 떠날 때에는 매장 식구들과 함께 먹으라며 시제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빵과 쿠키를 한 아름 챙겨주기도 했다. “와. 즐거웠다! 만호 씨는 어땠어요?” 만호는 빙긋 웃기만 했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은 선배를 만나서 마음껏 했다. ‘좋다’는 단어로만 꽉 채울 수 있는 하루였다. “전도일 셰프, ..
매실이 치워진 흰색의 케이크를 만호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한번 먹어 보세요” 자신이 만든 케이크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손을 댄 전도일의 행동이 만호는 불쾌했다. 이제는 그저 평범한 케이크 아닌가. 가만히 서 있는 채인 만호를 대신해서 민주가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들어내 입에 가져갔다. “어?” 동그래진 눈으로 도일과 만호를 번갈아 보는 민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훨씬, 맛있는데요?” 만호는 케이크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매실이 놓였던 자리에 아주 약간의 과즙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입 먹어봤다. 매실 조각에서 나오던 강한 신맛 대신, 은은하면서도 확실한 새콤함과 달콤함이 입안에 감돌고 있었다. 이제야 알아챘냐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도일이 만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
표정들이 미묘했다. 정만호가 만든 매실과 유자 케이크의 첫 시식 자리였다. 매장 사무실에 모인 직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강한나 매니저가 담담히 말했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두 번 먹을 것도 아니네요” 뭐라 말해야 할지 주저하던 유영빈 점장은 차라리 돌직구인 한나의 성격이 고마웠다. 며칠 동안 고심한 케이크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실망한 표정인 만호를 대신해서 함께 아이디어를 도왔던 민주가 물었다. “어떤 점이 부족한가요?” “보기에는 예쁜데 말이지…” 영빈이 녹색의 매실이 맛깔스럽게 올려진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단발머리를 뒤로 묶은 서한준이 말을 이었다. “매실의 신맛과 케이크의 단맛이 어울리지 않고, 서로 부딪히고 있어요” 한준의 의견에 사무실에 모인 모두가 수긍한 ..
“안 됩니다” 영빈이 뉴욕 크로넛을 집으려 할 때 한나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나도 한 번은 먹어봐야 되지 않나 싶어서…” “이곳 분석은 끝났는데, 굳이 회사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나요?” 한나는 손에 들려있는 법인 카드를 가볍게 흔들었다. 누가 회계팀 강철 여전사 아니랄까 봐. 영빈은 작게 한숨 쉰 후 말했다. “됐다. 내 돈으로 살게요. 강 매니저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요” 한나는 바로 집게를 들고는 영빈이 들고 있는 쟁반에 빵을 담기 시작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확실히 느끼하긴 하군요. 한준 씨의 데이터 분석 결과가 이해됩니다” “거, 엄청 잘 먹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묘하게 설득력이 없네요” 세 개 째의 크로넛을 쉬지 않고 입에 집어넣는 한나를 보며 ‘방금 전까지 먹지 말..
한껏 상기된 얼굴의 만호가 한 “좋아해요”라는 말에 민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어설픈 자신의 고백에 대한 민주의 답을, 만호는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빵이, 정말로 그렇게 좋아요? 난 그 정도는 아니던데” 안심한 건지, 우스운 건지, 서운한 건지 알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만호를 앞에 둔 채 민주는 접시의 빵을 하나 더 집어 입에서 우물거렸다. “아. 계속 먹으니까 느끼해요. 역시 난 셰프가 만든 케이크가 더 좋아” 민주와 만호를 시작으로 노라 크로넛을 상대로 한 스파이 작전은 계속되었다. 2주 정도 지났을 때 거의 모든 메뉴의 탐색이 마무리되었고, 아침 조회 시간에 다시 전 직원이 사무실에 모였다. “여러분 덕분에 여러 가지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빈이 노트북에 탐..
개장 전 아침, 카페 토라세 방배점 사무실의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 유영빈 점장과 강한나 매니저를 비롯한 매장 직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오늘 아침 조회는 안 좋은 소식으로 시작해야겠군요” 영빈은 사무실 중앙의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 매출 신장을 기록하던 우리 매장이, 지난달부터 매출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나는 뿔테안경 오른쪽을 두드리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고, 몇 명의 직원들은 분위기에 동참하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민주를 비롯한 몇몇만 천진난만, 혹은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강 매니저님. 이유가 뭘까요?” 영빈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한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어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