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라기보다는 소박한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내과나 이비인후과와 달리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랐다. 피아노 선율의 재즈 음악이 흐르고 서양화와 사진 작품들이 곳곳에 보였다. 접수처에서 예약 시간과 이름을 말하자 지금 원장님은 진료 중이며, 10분 정도면 끝날 예정이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적절한 수준의 친절함이 담긴 간호사의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스칸디나비아 풍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여있는 잡지를 뒤적이며 희정은 기다렸다. 삼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원장실 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쪽으로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는 접수처로 가서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잠시 후 친절한 인상의 간호사가 희정을 원장실로..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은 준호를 희정은 꼭 끌어안았다. 이제 자신보다 훌쩍 키가 커버렸지만 아침에 이렇게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해온 등교 인사였다. “이따 한 시에 엄마가 공개 수업 갈게. 교실에서 만나.” 준호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현관문을 닫았다. 언제 이렇게 컸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릎을 구부려야 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냘팠던 아이가. 이혼이 마무리될 때까지 집안 분위기는 아무래도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준호는 한창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변해가는 시기였다. 정서가 민감한 때에 부모가 다투는 모습은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희정은 바닥이 무너진 고층 건물 옥상에서 수직 낙하하는 듯한 아득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까불대며 늘 재..
결국 이럴 거면서 왜 그리 서둘러 결혼했는지. 경미는 준호와 쇼핑을 마친 후 돌아와 희정네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곳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흰 벽지 아랫부분에 어린 준호가 그려 놓은 낙서만 남았다. 9개월 만에 둘은 결혼했다. 준호를 먼저 가진 속도위반은 아니었다. 한창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렇듯 그들은 한순간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너무 빠른 결정 아닌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경미의 만류에도 희정은 앞으로 펼쳐질 행복을 굳게 믿었다. 준호 돌 기념으로 찍은 셋의 사진에서도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는 확신이 그녀의 얼굴에 환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희정을 배신했다. 준호 아빠의 외도 때문이었다. “에고, 우리 사무장님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개드니..
준호가 유모차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빠는 그 크로스백을 메고 다녔다. 외출할 때 예비 기저귀, 간식거리, 물티슈 같은 것들을 넣고 다니기에 크기가 넉넉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나들이부터 해외여행까지 준호와 함께 할 때면 늘 그 가방이었다. 준호네 가족과 자주 어울리곤 하던 경미는 “형부, 어깨 아프겠다”라며 축 늘어진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잠든 준호를 안고 있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다. 아빠 생각이 났던 건가. 경미는 준호의 표정을 살폈다. 눈동자에는 슬픔과 비슷한,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아련함이 떠올라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나서는 걷다가 힘들면 작은 손으로 아빠의 가방을 아래로 잡아당겨 업어달라는 말을 대신했던 꼬마가 지금은 경미보다 커졌다. 그래, 가끔은 보고 싶기도 하겠지..
“언니 또 저기 앞 사거리까지 가서 유턴할 거지?” 경미의 장난스러운 핀잔에 운전대를 잡은 희정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반대편 차선이 비어있어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했지만 희정은 표지판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쳤다. 조수석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경미는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 안전하게 가자.” 둘이 탄 차는 삼백 미터 정도를 더 직진한 뒤 유턴해서 아까 그곳으로 돌아온 후 우회전했다. 영어 학원이 있는 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과 부모들이 세워놓은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경미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창문을 내리고 밖을 두리번거렸다. “응 준호야, 이모야. 엄마랑 같이 지금 막 도착했어. 조금 늦었네, 미안. 밖으로 나와 있니?” “저기 보..
지금쯤 철가면의 그녀는 기다리던 그 순간을 맞이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나에게 다음 차례라는 조짐이 찾아왔으니. 전철을 타고 집에 도착해서 화장실 거울을 봤을 때 알아차렸다. 얼굴을 가린 돌이 조금 더 넓어졌다. 몰랐던 사이 턱과 하관까지 돌로 덮여 있었다. 내 얼굴은 프로 레슬러가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입술 주변만 피부로 남은 채였다. 이번은 마음속 유리에 금이 가는 등의 어떤 징조도 없었다. 그저 이제 때가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일 뿐,이라는 담담한 예언 문구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녀처럼 나도 기다릴 뿐이다. 누군가 나를 발견해 주기를. 놀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두근거리며 내게 다가오기를. 그러면 나 또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내게 찾아올 그 마지막 순간..
서점 입구 맞은편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주 앉았지만 둘 중 아무도 아직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재킷을 벗자 반소매 셔츠 밖으로 얇은 금속 재질의 타이즈를 입은 듯한 팔이 나왔다. 팔뚝부터 손가락까지 모두 미끈한 철에 덮여 있었다. 생활하기에는 나보다 편하지 않을까. 내 경우는 돌의 양감이 조금이지만 항상 느껴진다. 움직임도 그전보다 아주 약간 둔해진 기분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였다. 테이블 위에 양 팔꿈치를 대고 느슨하게 깍지를 낀 내 손등에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다. 예고 없이 팔을 뻗어 몇 번을 가볍게 문지르듯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만졌다. 순간 느껴진 것은 서늘함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전해오는 온도는 얼음 같은 차가움보다는 더운 날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었을 때 나오는 청량한..
인사 팀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오자 오른 팔꿈치가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면담이라기보다 경고 통보에 가까운 자리였다. 우리 팀의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팀원 모두가 단체 행동을 했다. 인원이 모자란 상황에서 충원도 없이, 팀장인 내가 강압적인 문화를 만들어 너무 힘들다는 고충이 접수됐다고 했다. 그에 대한 사실 조사 차원의 자리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으며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로 나는 당황했다. 그때 이미 오른팔에 무언가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모두 내 잘못이고 내가 모자란 탓이라고 나는 말했다.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말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분위기인 것이다. 다행히 징계 등의 인사상 불이익 없이 구두 경고로 마무리되었지만 ..
이번에는 오른쪽 팔꿈치가 돌로 변했다. 어딘가 딱딱해질 것 같은 예감이 요 며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역시 그렇게 됐다. 이제 온전한 피부로 남은 곳은 얼굴과 가슴 언저리, 그리고 팔꿈치를 제외한 오른팔뿐이다. 다른 곳은 모조리 돌이 되었다. 공사판에서 볼 수 있는 벽돌과 같은 회색이다. 만지면 꺼끌꺼끌하고 움직일 때는 예전보다 아주 조금 묵직한 기분이 든다. 그나마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영화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 중에도 돌로 변하는 캐릭터가 몇 있는 걸로 아는데 그들도 나와 비슷하게 느낄까. 몸이 돌로 변할 것 같을 때가 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징조는 항상 같다. 마음이 딱딱해지는 경우다. 상처를 입거나, 실망을 하거나, 어떤 사람이나 일 때문에 대책 없이 슬퍼질 때다. 화가 ..
여길 가야만 하나. 청첩장을 손에 들고 진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 토요일 결혼식이다. 주소를 보니 낯선 지방이지만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법한 위치였다. 정작 마음에 걸리는 건 결혼을 알려온 신랑이 경조사를 챙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축의금 이체로 대신할 수 있으면 그걸로 할 텐데 청첩장을 몇 번씩 살펴봐도 ‘마음을 전하실 분’에게 안내하는 계좌 번호는 없었다. 카카오뱅크 이체도 하기 어려웠다. 그의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카톡 친구 메뉴를 업데이트해도 친구 목록에 뜨지 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진욱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디지털과 먼 존재였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 그와 만난 곳이 온라인 커머스 회사였다는 게 농담처럼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