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출근길에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온다. 이른 아침이라 식욕을 자극하기는커녕 기름진 내음에 인상이 찌푸러진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24시간 고깃집이 있다. 건물 앞 꽤 넓은 공간에 포장마차처럼 커다란 차양을 올린 채 둥그런 드럼통 모양의 식탁을 열 개 남짓 늘어놓고 장사를 하는 집이다. 퇴근할 때 길 건너편 정류장에 내려서 보면 저녁 손님으로 꽤나 북적이곤 했다. 장사도 그만하면 잘 되는 듯한데 적당히 쉬면서 할 것이지. 종일 가게를 열면 운영비나 뽑을 수 있을까. 아침에는 자리도 거의 비어 있는데. 회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을 힐끔거리곤 했다. 도대체 누가 이 시간에 고기를, 거기다 술까지 곁들이면서 먹고 있는 걸까. 직업을 있는 사람들인가. 밤부터 마시기 시작 한 거면 술이 ..
6 킬로미터 정도 뛰고 있을 때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져 눈 뜨기도 힘들어 뛰지 못할 정도였다. 집에서 막 나왔을 때는 비가 드문드문 내렸는데 낭패다 싶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그늘막이 있다. 늘 달리는 코스이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벌써 곳곳에 파여있는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밟으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하얀 천막 아래에는 나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30분 정도 달릴 준비를 한 후 집을 나선다. 집 앞 공원을 한 시간가량 뛰는데,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다. 같은 시간에 늘 공원에서 보는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대개 나이 지긋한 부부가 함께 산책을 하거나, 나처럼 뛰는 사람들이다. ..
그대가 서쪽의 더운 나라에 있을 지금 나는 명동의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대가 예고 없이 떠남을 알려왔을 때 나는 오래전에 예고된 유효 기간 종료를 떠올렸다 열 번의 예약에 대한 보상 쿠폰이 올해로 사라진다는 예고를 기억할 때 열 번에 걸쳐 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의 호텔을 그대와 함께 찾았음이 새삼스러웠다 서울 한복판의 호텔 방은 비좁다 마치 그대와 함께 일본을 한창 쏘다니던 그때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셋이 함께 자야 했는데 도무지 트윈룸이 없었던 건 나카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란 걸 호텔 부근에 가서야 곳곳에서 울리는 음악을 듣고서 알았다 가방을 배게 삼아 바닥에서 잤지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를 편하게 재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 사대문 안 번화가에 위치한 호텔이지만 여행 기분을 내고 싶었..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세 번 읊조리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안심될 때가 있어 나를 향한 네 눈길에 더 이상 아무 감정도 없음을 알아채는 것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이 결국 무엇도 남기지 못했음을 곱씹는 것도 난 빈 껍데기만 남아 있음을 이제야 깨닫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다짐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누가 무엇을 잘 못했기에 이런 걸까를 생각하다 보면 화를 누를 길 없기도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늘 한 번 보고 조용히 입 밖으로 내뱉어 보면 크게 뚫려 있는 가슴속 구멍으로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 한 줄기 흘러들어가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이제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이 공간과 물건,..
나는 많은 것에 담겨 당신을 찾아간다. 당신의 오감은 불현듯 내미는 내 손을 쉽게 잡아주곤 한다. 나는 소리에 섞여 당신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리운 멜로디는 당신과 나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곳으로 데려간다. 짧은 선율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당신의 어떤 마음을 나와 함께 열어젖힌다. 그러나 어쩔 줄 모른 채 흐르기 시작하는 당신 뺨의 눈물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나는 냄새와 친하기에 쉽게 섞인다. 후각에 올라탄 나는 당신의 시선과 손끝까지 미친다. 순간 어지러움과 함께 찾아온 나 때문에 당신은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얕은 한숨을 쉬기도 한다. 당신은 나를 반기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짓는 미소와 함께 사라지고, 당신이 흘린 눈물과 함께 말라간다. 내가 찾아가는 것을 당신..
네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건 내가 죽는데 성공했다는 거겠지. 눈에 띄는 곳에 놓아 놨으니 어렵지 않게 찾았기를 바란다.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찌 됐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되도록이면 고통스럽지 않으면서도 내 주검이 흉해 지지 않을 방법을 나름 열심히 찾아봤어. 범죄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발견되기는 싫었거든. 내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많지 않다면 별로 힘들지 않게 떠났으리라 생각해도 된다. 네가 그걸 신경 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널 기억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너와 보낸 시간과 같이 갔던 장소,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기억하보니 언제부턴가는 널 기억했던 나를 기억하고 있더라. 기억을 또 기억한다는 게 참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론 또 고마워졌어. 그리 ..
“난 영빈이가 먼저 결혼할 줄 알았는데, 쯧” 불콰한 얼굴의 전도일의 혀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사석에서는 형,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한지가 벌써 언제냐며 유영빈을 격의 없이 대하던 그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영빈은 그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에이, 형님, 그 이야기는” “뭐 어때, 내가 속상해서 그래. 어차피 여기 만호 씨도 알잖아. 같이 방배점에 있었으니” “제가 알다니요? 혹시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만호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는 이름을 전도일이 다시 한번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한유리 과장 말이야. 둘이 잘 되길 바랐는데” 이제 연락도 없냐는 전도일에 말에 영빈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잘 지내겠죠. 거기 생활도 안정된 것 같더라고요. 일도 구했고, 새로 사귀는 ..
LJ 그룹 본사 1층 로비는 퇴근하며 나오는 사람들로 한창 붐비고 있었다. 유영빈 팀장은 구석에 서서 만나기로 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문 쪽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얼마 만이야, 만호 씨, 아니지. 이제 정만호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네. 하하” “어휴, 점장님.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만호는 아직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영빈을 점장님이라고 불렀다. 그와 함께 있던 푸드 개발 부문의 전도일 셰프가 “아니, 아직도 점장님이라고 하네”라며 껄껄 웃었다. “그러게요. 방배점에서 있던 때가 벌써 2년 전이네요” 영빈의 눈가에 그리움이 스쳐 지났다. “오늘 미팅은 잘 하셨어요?” 밖으로 걸어..
한준의 차에 탄 한나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그럼 우리 먼저 갈게요. 두 사람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요” 하얀 입김을 머금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한나의 눈가에는 아직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민주 씨, 우리 또 만나요”라며 말한 후 창문을 닫은 한나는 차가 움직이기 직전까지도 애틋한 눈빛으로 민주를 바라봤다. “이젠”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 민주가 옆에 서 있는 만호에게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둘만 남았네요. 셰프, 추운데 들어갈까요? 할 얘기 있다고 했죠?” 만호는 고개를 든 채 밤하늘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베이킹 조리실의 조명이 켜지나 익숙한 풍경이 민주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한정판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초콜릿 가루를 부쉈을 때의 ..
마지막 손님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들에게 매장을 정리하던 민주가 밝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또 찾아 주세요”라고 인사했다. 이제 2층 매장에는 민주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는 그 공간을 그녀는 한참 동안 천천히 둘러봤다. 잠시 후 휘유, 짧은 한숨과 함께 매장의 조명 스위치를 내렸다. 그렇게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민주의 마지막 날이 끝났다. 영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직원들 모두가 민주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막냇동생을 어디론가 멀리 보내는 오빠의 표정을 짓고는 ‘건강해요, 가끔 놀러 오고’라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는 한 명씩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애써 명랑하게 예압,이라고 장난기 어리게 웃으며 답했다. 서한준이 어떻..